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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새정부 교육과정 대폭 쉽게 바꾼다"


[연함뉴스=채홍석 기자] 교육부가 사교육 부담 완화를 위한 교육과정 개편에 대해 내달 1일 서울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공청회를 개최한다.

교육부의 주관으로 열릴 이번 공청회는 국회의원, 교육부 및 17개 시·도교육청 정책관계자, 교육관련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할 예정으로 그간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과열된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는 판단 하에 교육과정을 파격적으로 전면 재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사교육의 원인이 현행 교육과정의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라는 판단 하에 핵심과목 특히 수학/과학 교육과정의 난이도를 대폭 낮추는 방안이 이번 공청회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관련하여서는 미적분학 삭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의 선택과목을 과학의 단일 과목으로 통폐합하는 안이 거론되고 있으면, 이렇게 될 경우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과학을 완전삭제하게 된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원주율을 3.14가 아닌 3으로 대신하는 방안 역시 검토할 계획이다.

이런 교육과정을 채택함으로써 특별히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 공부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파격적인 교과과정 개편에 따른 일부 교과목 교사들이 갈 곳을 잃으리란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고, 중등교육의 난이도가 지나치게 낮아 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시켜 사회로 내보내야 하는 대학의 반발도 거셀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공청회에서 교육정책연구소 민우중 소장이 ‘교육과정 난이도와 사교육 시장 크기의 상관관계’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서울교대 표상득 교수의 사회로 전문가 패널들이 토론을 통해 새로운 교육과정의 내용과 추진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관계자들의 질의·응답을 나눌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한 공청회를 앞두고 “새로운 교육과정 도입은 사교육을 없애고 국내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국내 교육계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라며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교육발전의 전환점이 마련되도록 모두가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주면 좋겠다”고 기대를 전했다.

기사원문 링크 : http://goo.gl/qK1HT

자야되는데 이런 혈압 끓는 기사가 다 잉네 ㄷㄷㄷ

@ 덕분에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군요. 이 기사와 관련한 자세한 생각은 자고 일어나서...
2013/04/01 03:31 2013/04/01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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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서버 이전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2/12/28 20:23 최박사
최근 서버 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블로그 주소가 꼬이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제 정상화된 것으로 보이니 조만간 활동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혼돈과 무질서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쿨럭~
2012/12/28 20:23 2012/12/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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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라온 @capcold님의 트윗 :

http://t.co/FHExdTZh 부정부패로 감방 가신 뭇 기득권 정치인님들과 회장님들은 꽤 높은 확률로 지속적으로 c일보를 보셨을텐데, 똑같이 "c일보 계속 보다보면 결국..." 이라고 결론내리면 재밌겠다.
을 통해 알게 된 웃지 못할 기사 하나 (그렇지만 우낀 걸 어떡하지? ㅋㅋㅋㅋㅋ) :
"포르노 계속 보다 보면 결국…" 범죄심리학과 여교수의 증언

이 바닥에서는 꽤나 클래식한 예이긴 한데,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리는 날에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수영 능력이 저하돼서 물에 빠져 죽으니까 아이스크림을 못 팔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날 믿어줄까? 당장 "저런 X끼도 박사인 거 보면 박사 학위는 아무렇게나 주나봐"라고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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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조금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발전소에서 일하거나 거대한 송전탑 근처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 발병률이 높다. 이를 바탕으로 "전자파가 암을 일으킨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오오, 그래?"라며 솔깃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단순히 솔깃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자파가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있다"며 호들갑을 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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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이유는 아이스크림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라고 쓰고 믿고라고 읽는다) 있는데 반해 발전소에 대해서는 뭐가 위험한지를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익사자의 수와 관련된 통계를 아무리 많이 보여줘도 아이스크림은 위험하지 않다는 믿음은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믿음은 사실 틀리지 않다.

아이스크림과 익사자 사이의 숨은 연결고리는 바로 날씨다. 날씨가 더워지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도, 물놀이를 떠나는 사람도, 그리고 물놀이를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리고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많으면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많아지게 마련. 그렇다보니 날씨가 더워지면 아이스크림 판매량도 늘어나고 익사자의 수도 늘어난다. 즉, 아이스크림과 익사자의 수는 (날씨라는 변수를 통한) 상관관계가 있을 뿐 인과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전자파와 암은 어떨까? 문제는 전자파가 뭔지 잘 모르는, 전자렌지를 돌리거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언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자파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발전소에서 일하거나 거대한 송전탑 근처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 발병률이 높다"는 보고가 되면, 그 보고가 "발전소와 송전탑에서는 전자파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과 결합하여 순식간에 "아, 지금까지 몰랐는데 전자파는 위험한 녀석이구나"라는 증거로 둔갑을 한다. 이런 "증거"에 기반한 주장은 꽤나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리고 이렇듯 "증거"에 기반하여 생겨난 "전자파는 위험하다"는 믿음은 한번 생겨나면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애초에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은 "발전소에서 일하거나 거대한 송전탑 근처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 발병률이 높다"였지, "전자파를 많이 쬐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 발병률이 높다"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vs 익사자"의 구도에 대응되는 건 "발전소(송전탑) vs 암환자"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익사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날씨"라는 연결고리가 필요했듯이 발전소와 암환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라? 무슨 연결고리가 있지? 전자판가? 응, 그럴 듯한데, 전자파라고 하자. 이렇게 된 거다. 이런 이해하기 쉬운 단순 명료한 해석은 언제나 우리 인간을 유혹한다. 답을 잘 모르겠는 문제란 얼마나 따분하고 골치 아픈가 말이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다.

전자파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애초의 우려와는 달리 발전소나 송전탑 근처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환자가 많은 것은 단순히 전자파 때문이 아니라 빈부의 차이 등과 같은 다른 사회적 요소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는 증거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거다. 즉, 전자파가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전자파가 위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만큼 이를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전자파가 문제다"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걸 전자파 문제로 단정짓는 순간 다른 숨은 연결고리가 있는지 여부를 찾을 이유가 없어지고, 진짜 위험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포르노와 성범죄도 마찬가지다. 포르노를 많이 본 사람과 성범죄자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리고 애초에 청소년기때부터 포르노를 보는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통계를 접한다면 당연히 포르노가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유혹적인 결론이 눈 앞에 딱하고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기사의 "포르노 시청 자체가 범죄로 연결되진 않지만 범행 부채질 할 순 있어"라는 부분은 "포르노와 성범죄 사이의 인과관계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우린 너네가 포르노 보는 거 그냥 싫어"의 완곡어법으로 들린다.

진실은 포르노를 봤기 때문에 성범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선가 성적 욕구가 뒤틀리고 왜곡된 사람들이 포르노와 성범죄를 통해 자신의 그 욕구를 해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그럴 "듯"한 연결고리에 혹해서 포르노 근절을 통해 성범죄 예방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 그리고 그렇게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아이스크림 판매를 금지함으로써 익사자를 줄이려던 최박사를 한번쯤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2012/07/25 13:58 2012/07/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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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뒷북인 감이 있지만 꼭 한번은 정리해서 써야지 생각했던 내용이라 뒤늦게 나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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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 친구가 어느날 와서는 자신의 장례식장에 들어와 온기도 없이 싸늘해진 시체가 갑자기 벌떡 살아일어났다 이야기를 한다면 '이 친구가 포르말린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이 나갔나?'라는 생각을 할 거다. 설령 그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동영상으로는 사람이 정말 죽었다는 걸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은 그냥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두 눈으로 어떤 사람이 죽는 걸 확인하고,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을 목격하지 않는 한, 누가 그 이야기를 전한들, 그 이야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기가 쉽지, 그 이야기를 믿기란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사람들은 실제로 믿는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소위 신화들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다양한 문화의 다양한 신화에 담긴 이야기들을 두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지금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우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그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대신에 그 이야기에 모종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기서 그 믿음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명백하게 거짓이라고 밝혀진 적은 없으니까. 결국 "신이 존재한다면" 가능한 이야기들이니까. 전제가 참이라면 그 결론은 참인 상황에서, 전제가 참이라고 믿는다면, 그 결론이 참이라고 믿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명백하게 거짓이라고 밝혀진 적이 없듯이, 그 모든 이야기들이 참이라고 밝혀진 적 또한 없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내 장의사 친구의 말을 내가 믿어 준다고 해서, 그 친구의 말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 이야기가 참이라고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많고 적음이 신의 존재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태생적으로 대단히 사적이고 은밀한 진리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행위이든, 무신론적 종교에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행위든 전부 대단히 사적인 행위이다. 나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설명을 통해 같은 종류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종교적 신념은 생겨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아는 형 중에 학교 생활이 정말 힘들어 보이는 형이 있었다. 지도교수와 궁합도 잘 맞지 않았고, 폭행, 차사고 등 안 좋은 일도 유난히 많이 벌어지는 참 기구한 팔자를 가진 형이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매사가 지긋지긋하게 꼬여서, 그냥 하는 말로 '굿이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형은 굿을 하는 대신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 일들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한다면 처음에는 큰 기대없이 시작한 종교 활동에 크게 의지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실제로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일을 극복할 때 종교가 큰 힘이 되는 경우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믿는 종교는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리라. 방금 예를 든 것과 같은 다소 극단적인 케이스들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종교의 힘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내가 특정 종교를 믿기 시작한 이후로 (크던 작던) 이런 변화들이 생겼다"라는 경험은 그 말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은 "오오, 그래?"라며 더 솔깃할 수 있겠지만, 어떤 두 사람도 완벽하게 동일한 경험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 역시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내면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한 그건 그냥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었던 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대단히 사적이고 은밀한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믿지 말라거나 믿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경험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 중 누구나 하는 일이고, 그게 산다는 거니까. 누군가가 무언가를 진리라고 믿는 것을 굳이 틀렸다고 말하고 다닐만큼 난 아는 게 많지 않다. 다만 그 형이 종교 활동을 하는 대신에 그 당시에 무당을 시켜 굿을 했더라면, 그리고 그 이후에 그 형의 삶이 많이 달라졌다면 그 형은 아마 지금쯤 무당을 열심히 믿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간혹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종교와 과학이 갈라진다. 과학은 동일하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진리를 논하지 않는다. 의사조차도 희망이 없다고 한 말기암을 투병을 통해 극복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이 겪은 좌절과 고통, 용기와 희망의 크기가 다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 두사람 각각에 대해 불가능을 가능케 만든 원동력에 대해 자서전이나 자기개발서를 통해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이 어떻게 암을 극복했는가에 대한 과학적 진리란 존재할 수가 없다.

반면에 우리는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본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기에는 이미 400년 정도 너무 늦게 태어났지만, 어쨌든 사과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경험은 살면서 수없이 했다. 주변의 다른 조건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사과는 땅에 떨어진다"는 공통된 경험에 대한 진리가 바로 중력의 법칙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행위이다고, 종교의 진리와 그 종류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리를 찾는다고 해서, 모든 과학적 가설들과 이론들이 흔들리지 않는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주의 비밀을 다 풀어낸 것이라고 여겨지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세월이 지나면서 틀렸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과학적 법칙들은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이고,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어쩌면 그런 찾아낸 진리 혹은 진리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보다도, 그런 진리를 찾는 과정에 있다.

일반인들에게야 그다지 관심없는 내용이겠지만, 최근 대한민국이 과학계의 조롱(?)을 받을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의 일부 창조론자들의 노력(?)으로 진화론이 일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빠지게 됐다는 뉴스가 한달반쯤 전에 나왔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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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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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수준으로 검증된 과학적 이론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진화론은, 분자 생물학과 DNA 단위에서 보면 진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진화의 증거로 수집된 화석들을 보면 진화가 연속적이지만은 않다는 등의 문제로 단세포 생물에서 출발하여 인간과 같은 고등생물이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의 이런 불완전함을 이야기하며 진화론이 교과서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과학을 100% 검증 가능한 진리와 동치로 놓으면서 발생한 오류다.

사실 진화론을 실험적으로 재현해 내기에는, 실험방법론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수명은 물론 인류의 역사 자체가 너무 짧고 보잘 것 없다. 인간 수명을 100년으로 잡아도 그 수십, 수백만배에 달하는 오랜 시간 전에 있었던 생명의 기원과 발달, 우주의 기원 등을 밝혀내는 일은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파헤쳐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일종의 탐정놀이이다.

범행현장에 있던 CCTV에 범인의 얼굴이 또렷하게 잡혀 있는 게 아니라면, 다양한 단서와 증거들을 통해 범인이 누구였는지 유추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구 구석구석에 뿌려진 다양한 단서들을 통해 유추해내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우주는 "전지 전능한 신이 만든 그대로다"라고 하면 물샐 틈 없는 완벽한 이론인 창조론이 나오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탐정놀이의 여지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호기심을 박탈한다.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이 실려 있어야 하는 이유는 진화론이 물샐 틈도 없는 완벽한 이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탐정놀이의 결과로 탄생한 현재까지는 유일한 가설이기 때문이다.

비록 때로는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자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이런 탐정놀이는 그 자체로 바로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고, 진화론을 과학 교과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이런 과학적 호기심을 허용하고 장려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다 잘 가르쳐줄 수 있다.

2012/07/23 16:55 2012/07/2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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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은 약 0.4에서 0.5초만에 18m 정도 떨어진 포수에게 도달한다. 야구공은 0.1초에 약 4-5m를 이동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투수의 손에서 공이 빠지면서 포수를 향하는 대신 타석에 서 있는 타자의 머리를 향해 공이 날아가고 있다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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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공이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면 피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떤 사물에서 나오는 빛이 사람의 시신경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그 사물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약 0.1초, 또 뭔가를 보고 몸이 다시 그에 반응하기까지는 또 약 0.1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가 아닌 타자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위해 야구공의 궤적을 0.2초 정도 바라봤다면, 실제로 공은 이미 0.3초를 날아왔다는 이야기이고, 그 공을 보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에 공은 이미 타자 머리통에 박혀있게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물론 때로는 투수가 던진 공에 타자가 맞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공이 타자쪽을 향해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타자들은 제법 잽싸게 잘 피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신경학자인 Mark Changizi는 자신의 저서 <The Vision Revolution>에서, 인간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인간의 뇌는 어떤 사물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한 순간에 대한 그 사물의 위치와 속도 정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약 0.1초 후에 그 사물이 어디쯤 가 있을 것이고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를 미리 예측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시신경과 뇌가 신호를 처리하는 0.1초의 딜레이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에 사물이 0.1초 전에 어디 있었는가가 아닌, 현재에 어디 있는가를 인식한다는 이야기.

이런 미래를 예측하는 시각의 진화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맹수를 피하고, 먹잇감을 사냥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냥감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하는 시점에 그 사냥감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 빛이 뇌에 전달되어 사냥감을 인식하는 시점에 사냥감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은 꽤나 분명해진다. 맹수나 먹잇감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하는 순간의 위치 정보를 뇌가 정직하게 인식했다면, 인류는 맹수에게 죄다 잡아 먹혔거나, 사냥에 실패해서 굶어죽었을 거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우리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이건 그냥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여기는 과학을 논하는 블로그잖아? 증명을 해야지, 증명을. 실제로 지금 영국 서섹스 대학에 있는 Romi Nijhawan 교수는 1990년대에 실험을 하였다. 어둠속에서 공이 굴러가는 가운데 공이 플래쉬 옆을 지나는 순간 플래쉬가 번쩍인다. 그런데 우리 눈과 뇌에는 플래쉬가 번쩍이는 순간 이 공이 플래쉬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아래 그림처럼 공이 플래쉬를 이미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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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즉, 인간의 시각은 움직이는 대상체의 위치와 속도를 예측하여 인식하게끔 최적화되어 진화해 왔다는 거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시각은 정지해 있는 이미지를 프로세싱하는 데에는 꽤나 서툴다. 그리고 모든 착시 현상은 이런 서툰 이미지 프로세싱의 결과다.

꽤나 유명한 착시 현상 중 하나인 Müller-Lyer 착시 현상을 살펴 보자. 아래 그림처럼 화살표시(?)가 돼 있는 선 두개를 놓고 보면, 이 둘은 같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선이 아래의 선보다 짧아 보인다. 이게 도대체 움직이는 환경을 관찰하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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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조금 바꿔보자. 아래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어떤 건물의 귀퉁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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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우리가 실제로 이런 건물 앞에 서 있다고 한다면, 왼쪽의 회색 선은 건물 전체 높이의 일부분에 해당하고, 오른쪽의 회색선은 건물 전체 높이와 일치한다고 판단할 것이고, 따라서 오른쪽의 회색선이 왼쪽의 회색선보다 길다고 생각한다면 그 판단은 정확하다. 결국 우리 뇌는 시각적으로 길이가 같을 때 이를 같다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길이가 같은 두 선의 길이를 같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다. 이는 우리가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을 인식할 때,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정확성이 아닌 그 시각적 정보가 상징하는 대상의 물리적 정확성을 예측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물리적 정확성은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체의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이 정확할 때에만 유효하다. 즉, 물리적으로 동일한 길이를 놓고 보더라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길어보이고, 멀어질수록 더 짧아진다는 예측을 미리 하고, 시각적으로 전해지는 정보가 그 예측에 정확히 일치하는 걸 확인함으로써 어떤 물체의 물리적 길이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이제 약간 다른 종류의 착시 현상을 살펴보자. 아래 그림의 정중앙의 점을 보면서 머리를 화면을 향해 앞으로 움직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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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주변의 부옇게 된 타원체들이 실제보다 더 빨리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는 환경이 주는 시각적 정보를 해석하는 뇌가 일으키는 착각이다. 더 자세한 게 궁금한 분들은 앞서 언급한 <The Vision Revolution>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아무튼 핵심은 인간의 시각은 움직임을 통해서 주변을 감지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착시는 정지된 이미지에 대한 뇌의 착각의 결과이다.

작년 여름에 "스트레스 레벨을 확인시켜주는 그림"이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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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스트레스 그림? 빨리 움직이면 “스트레스 많이 쌓였네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애니메이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스물스물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착시 현상의 하나로, 앞서서 봤던 머리를 움직이면 부연 타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눈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의 눈은 원래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림 여기저기를 계속 스캔한다. 그리고 그런 눈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위의 그림 중 어느 한부분에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물결치는 현상이 느려지거나 멈추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림이 물결치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보다 효율적인 시각 정보 처리를 위해) 사람 눈동자가 정지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이 그림이 물결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신경외과나 안과를 찾아가 볼 것을 진지하게 권한다. 스트레스 레벨에 따라 사람 눈동자의 움직임이 심해진다는 생리학적 현상이 밝혀지지 않는 한 (아직까지 이런 사실이 보고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겠다.

@ 관련글 : 그럴 리가 없어!

@@ 작년 8월에 스트레스 그림이 한창 떠돌 때 써야지 생각했는데 거의 10달에 걸쳐서 쓴 글 -_-a

2012/05/22 15:43 2012/05/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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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1일, 111111로 1이 무려 여섯개가 찍히는 오늘은 빼빼로를 만드는 롯데제과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날. 그리하여 오늘을 위해 기획한 프로모션이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 천년에 한번 있는 날이란다. 이래서 애들 숫자 세는 법을 잘 가르쳐야 한다. 11.11.11.은 천년이 아니라 백년에 한번씩 찾아온다. 2111년이 되는 100년 후야 말로 111.11.11이 찍히는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 롯데제과 바보.

@ 엄청 오랜만이군효, ㅋ.
2011/11/11 10:06 2011/11/1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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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옵니다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10/07 16:45 최박사

이 블로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 한권 나옵니다. 7명의 비작가들이 소설을 쓰게 됐는데, 그 중 한명이 접니다. 제가 쓴 글이지만 쪽팔려서 책 홍보는 못하겠고, 책에 실은 저자 소개는 마음에 들기 때문에 블로그에 올려 봅니다. -_-,,

최형순

1980년생. 명색은 물리학자. 궤변과 음모론에 능함. 이 책을 통해 밀리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으나 곧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 중이라 전해짐. 밀리언 셀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100만부 팔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엔가는 반드시 그 절반인 50만부의 책을 팔아야 함. 50만부의 책을 팔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 절반인 25만권을 팔아야 하고, 그 전에 12만 5천권을, 그리고 그 전에 차례로 62500권, 31250권, 15625권의 책을 팔아야 함. 15625권의 책이 팔리기까지는 어느 시점에선가는 그 절반인 7812.5권의 책이 팔려야 함. 그렇지만 책을 0.5권 단위로 팔 수는 없으므로 7812.5권의 책을 파는 것은 불가능. 따라서 차례로 15625, 31250, ..., 50만, 100만부의 책을 파는 것 역시 불가능.

2011/10/07 16:45 2011/10/0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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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들어 글이 하나도 없네. -_-a "나의 과학은 이렇지 않아" 16탄도 올린다고 했었는데 양치기 소년 됐고... 뭐, 이미 양치기 소년 된 마당에 "내일까지는 꼭 새글을 쓰겠다"며 굳이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고, 요새 이상하게 글이 안 써지는데, 심심해하지 마시라고 퍼즐이나 하나.

당신이 무한히 넓은 평면 위에 임의로 점을 10개를 고른다. 상대방은 똑같은 크기의 동전 (예를 들면 500원짜리 동전) 10개를 준비하여 이 점들을 가리려고 한다. 당신은 동전들이 서로 포개지지 않고는 이 10개의 점을 다 가리는 게 불가능하게끔 평면 위에 점 10개를 선택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당신이 10개의 점들을 아주 넓직 넓직 퍼뜨린다면 상대방은 점 하나에 동전 하나씩을 올릴 수 있다. 반면에 점 10개를 충분히 오밀조밀하게 모아 놓으면 상대방은 동전 하나로 점 10개를 다 덮고, 나머지 9개의 동전은 아무데나 던져 놓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점 10개를 잘 배치하면 동전들이 서로 겹치지 않고는 이 점 10개를 모두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그리고 그 이유는?

@규칙(?)은 아시죠? 정답을 아시는 분은 비밀덧글로 써주세요.

@@ 퀴즈의 출처를 밝히는 게 도리이겠으나 출처를 따라가면 답도 확인할 수 있는 관계로, 퀴즈의 출처와 정답은 9월 25일에 일괄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 정답이 늦게 올라와서 죄송합니다. 파드캐스트도 못 올리고, 완전 양치기 소년이 돼 버렸는데, 요새 많이 바빴습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바쁠 것 같아서 파드캐스트와 블로그 업데이트에 상당한 차질이 있을 것 같습니다. ㅈㅅㅈㅅ... 아무튼 이 문제는 미국의 경제학자이면서 The Big Questions의 저자인 Steven E. Landsburg의 책 제목과 동명의 블로그 The Big Questions에 소개된 문제입니다. 정답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

정답 확인

2011/09/15 15:52 2011/09/1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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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달린 도투록님의 댓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저는 행위와 의도, 정책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던 것뿐인데, 곽노현이란 인물에 대한 제 판단을 읽으신 것 같군요. 아마도 꼬랑지에 곽노현 교육감이 사임해야할 것 같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렇게 된 김에 제 입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곽노현 교육감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 방송인과 같은 소위 공인들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내리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성직자이냐 불법주류상이냐는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제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근거도 “그럴 줄 몰랐는데 실망이야”라고 생각할 근거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잘 살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갖고 삽니다. 이는 사실 도투록님께서 제 글을 하나 혹은 몇개 보시고 저에 대해서 “실용적인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라고 판단하시는 과정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런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엄청나게 반사적이고 직관적이고 순간적입니다. 도투록님은 저에 대해 특별한 선의도, 악의도 없었겠지만, 제 글을 읽는 순간 받게 되는 인상이 있었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제가 하는 다양한 말과 행동들이 그 첫인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 스스로 또는 제 주변 사람들이 저에 대해 ’사실 나는 그렇게 실용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증명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보라는 것 외에 저에 대해 이런 사람인지 저런 사람인지 확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저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객관적 실재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저는 도투록님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2억을 건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람들이 곽노현 교육감에 대해 갖게 되는 인상이 있습니다. 제가 도투록님 한분께도 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이해시키지 못한다고 봤을 때, 수백/수천만명에게 노출된 곽노현 교육감이 “이번 일로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말만으로 특정 이미지를 무마시키기란 어렵습니다.

앞서서 곽노현 교육감이 성직자이냐 불법주류상인지를 제가 알 길이 없다고 했는데, 제가 곽노현이란 인물에 처음 받은 인상, 이번 일이 터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의 인상, 그리고 그의 해명을 듣고 나서 받은 인상 모두 따지고 보면 단편적인 조각들에 불과합니다. 저는 곽노현 교육감이랑 밥 한끼 먹어본 적도, 차 한잔 마신 적도, 아니, 직접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고, 곽노현을 직접 아는 사람조차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곽노현이란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은 언론에 보도되는 경력 몇줄과 그가 제시하는 교육 정책 몇가지가 고작입니다.

누군가가 이번 일을 통해 그가 알고 보니 부패한 사람이더라라고 판단하는 걸 보고 부당하다고 느끼신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그 사람이 전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가 청렴결백하고 하늘 아래 한점 부끄럼없는 인물이라고 믿었던 것 역시 그다지 믿을 수 없는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저는 곽노현이나 다른 어떤 정치인들 혹은 방송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성직자냐 불법주류상이냐를 확인하는 일보다도, 차라리 그들이 펼치려는 정책이 어떤 것들인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지지하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성직자여도 불법주류상이어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거죠.

단, 본글의 주석에도 달았는데 이쯤에서 한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건 여기서 불법주류상은 공익을 내걸고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정말 내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도 이용할 각오가 돼 있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개인적 이득을 조금 취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란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불법”을 저질러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요.

그러면 왜 갑자기 이번 일을 갖고 그가 옷을 벗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느냐? 곽노현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하니” 단순히 실용을 위해 곽노현을 얼른 내치고 다른 일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공직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공직자가 어떤 행동을 어떤 의도를 갖고 했는가에 대해 정확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직자가 따라야 할 도덕적/법적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이란 건 다른 사람의 의도는 직접 관찰이 안 되고 행위만을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이란 동물이 가진 한계상, 미리 특정 행위는 특정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자고 하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아무튼 사법부에서 의도를 판단하는 약속과 사회적/도덕적 관점에서 의도를 판단하는 약속은 많은 경우에 비슷하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는데, 곽노현 교육감이 본인이 빚을 내면서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2억원을 건내준 일이 여러번 있지 않은데, 돈을 받은 사람이 하필 마지막에 후보 단일화를 했던 박명기 교수였다는 점, 현금을 전달하는 방식의 아주 치밀하게 숨기진 않았지만 어쨌든 제3자를 거쳐서 돈을 직접 건냈다는 점 등의 정황을 봤을 때 이번 일은 많은 사람의 눈에는—법적 문제는 법원의 판결을 두고 봐야 하겠지만—적어도 도덕적으로 합의된 약속을 어긴 케이스입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개인적인 관계의 사람들은 물론 그를 보호하고 싶겠지만, 그런 보호는 그 관계가 개인적인만큼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고, 공직자로서의 곽노현은 도덕적 합의를 어긴 그 행위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곽노현 교육감이 본인에게 아무리 떳떳하더라도 이런 사회적 약속의 의미와 자신이 그런 약속을 어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만큼 사임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느냐”고 하신다면, 똑같은 사건이 도투록님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같은 정도로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를 밝혀내려고 할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란 걸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요? 정말로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곽노현 교육감을 지지했던 사람들로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가까울 겁니다.

다양한 재판 과정을 보면 많은 경우에 범법 행위를 입증한 후에도 그 행위의 의도를 입증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도의 입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시면—본인이 자백을 한 경우를 제외하면—범법 행위와 관련된 다른 행위들이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는가 따위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전 중에 교통 사고로 사람을 쳤을 경우, 이때 본인의 의도가 뭐였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차에 치인 사람이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운전자가 술을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신호는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사고 후 도주했는가 아닌가 등등의 외부에서 관측 가능한 조건들을 통해서 의도적 살인인지, 과실 치사인지 따위가 분류되는 것도 특정 행위를 특정 의도로 엮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것임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이걸 실용주의라고 묶어버리시거나, 제가 실용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하신다면, 글쎄요, 도투록님이 저에 대해서도 곽노현 교육감에 대해서도 어떤 계기로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는가는 한번 정도 되짚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후에도 저에 대해서나 곽노현 교육감에 대해서나 도투록님이 갖고 있는 판단이 정확하고 날카롭다고 여겨지신다면, 앞서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실체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도투록님이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저인 겁니다. (영어로는 I am who you think I am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우리말로는 쉬운 말이 없네요.)

2011/08/30 14:58 2011/08/3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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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사이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느라 뉴스를 등한시한 사이에 대형 폭탄이 터졌네. -_-,, 개인적으로는 capcold님과 생각을 같이 하는데, 그런 내용의 글은 잘 없는 관계로 글 하나 급하게 뱉어내봤다.

§불법주류상과 성직자(Bootlegger and Baptist)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이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추측해하야만 하는 이상한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클렘슨 대학(Clemson University)브루스 얜들(Bruce Yandle)이라는 경제학자가 각종 규제의 탄생 배경과 작동 원리(?)를 설명한 이론으로 불법주류상/주류밀매업자와 성직자 이론(Bootleggers and Baptists Theory)이란 것이 있는데, 이게 이런 우리가 늘상 하는 상대방의 의도 추측 게임에 꽤나 교묘하게 적용이 될 수 있다. 이 이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성직자들이 ’술은 사회적으로 유해하므로 최소한 주일에만이라도 금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한다. 이런 이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고 그 의도도 순수하다고 판단한 정부가 일요금주령을 발동한다. (금주령은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특정 개인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제삼자–정부의 힘을 빌린 교인들–가 대신 정해주는 것인만큼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선호한다는 원론적인 논의는 이 자리에서는 피하기로 하자.) 이런 식으로 규제가 발생할 때 뭐가 문제일까?

금주령이 발동될 경우 즉각적으로 일요일에 술에 대한 공급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의 강제적인 공급의 제거는 수요의 감소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술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고, 공급이 급감한 경우 그 수요와 공급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불법주류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이 불법주류상은 (음지에서) 시장을 독점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취하게 된다.

이 예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핵심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움직임이 정부 규제를 통해 특정 이익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이익 집단에게 이 규제를 유지 또는 강화할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불법주류상들이 금주령을 지지하는 원인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이지만, 그런 자신들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금주령 유지나 강화를 위한 로비를 할 때는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도덕적 당위성’ 따위를 내걸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집단, 성직자들과 불법주류상인들 사이에 의도치 않았던 연대가 형성된다.

얜들이 이런 현상의 실질적 예로 든 것 중 하나가 영국에서 18세기 미성년 노동법 규제 움직임이 처음 일었을 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섬유산업이 미성년 아동의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었다는 통념과 반대로, 섬유산업의 사용자들이었다는 거다. 그 이유는 이미 상당 부분에서 생산과정을 자동화한 공장 소유주들 입장에서는 미성년 아동들의 노동 규제를 통해 경쟁업체들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에게 ’어린 아이들의 인권 보호’라는 도덕적 구호만큼 효과적인 로비 수단은 드물었던 셈.

§ 정치와 도덕적 우위

이 이론과 일례는 도덕적으로 숭고한 가치라도 거의 언제나 누군가의 실질적이고 금전적인 손익과 맞물리기 때문에 그 도덕적 가치만을 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는 똑같은 행위, 예를 들어 음주의 사회적/개인적 폐해를 거론하며 금주령을 지지하는 행위 밑바닥에 도덕적 가치 보호(성직자, baptist)와 개인의 금전적 이득(불법주류상, bootlegger)[footnote]"불법"주류상이라고는 했지만 겉으로는 공익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사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상징을 아우르는 말일 뿐 여기서 사적 이익을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느냐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footnote]이라는 두가지 철저하게 다른 이유 가 있을 수 있기에 누가 이 두 가지 중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파악하기란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자기기만을 하게 마련인지라 바깥 사람들이 봤을 땐 불법주류상에 가까워보이는 사람들조차 자기 스스로는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생산시설이 자동화된 공장주들 중 이게 자신의 손익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인권 보호”를 구호로 로비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싸움으로 바뀐다. 자신이 특정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가 성직자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설령 그로 인해 약간의 금전적 이익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건 부차적이거나 상황이 만들어낸 우연일 뿐 그런 실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설령 그 정책으로 인해 금전적 이득을 보더라도 그건 그 상황의 부산물일 뿐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성직자여야 하고 실제로 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은 전부 불법주류상의 주장이 되고 만다. 이때 정치적 정당성 확보는 누가 성직자인가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압축이 된다. 그렇다보니 이번 곽노현 교육감-박명기 교수의 금품수수 사건과 유사한 일이 터지면, 한쪽에서는 곽노현이라는 개인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고, 또 한쪽에서는 이를 사수하려고 이를 악물고 싸운다.

이번 일을 놓고 곽노현 교육감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의 과거 행적과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그가 2억을 전달한 것에 대가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과 독립적으로 그의 과거의 행적을 판단하는 과정이 개입하여야 하는데, 그게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다. 우리는 그의 의도에 대해 그의 행동과 스스로 말로 밝히는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나만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결국 그 행동이 성직자적이었는지 불법주류상적이었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똑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 교육 정책은 곽노현보다 크다

그런데 그가 성직자인지 불법주류상인지를 조목조목 증거를 들어서 “과학적 진실”을 밝혀내듯이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행위에 있지 않고 의도에 있는데,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증거는 행위일 뿐이고, 의도는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들을 보고 그들이 성직자인지 불법주류상인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이미 누군가는 성직자이거나 불법주류상이라고 속단을 내린 상태에서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의 의도를 그에 맞춰 해석하는 일이 많다.

이는 검찰이 “표적수사”를 한다는 비판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표적수사라는 건 수사라는 검찰의 행위에서 표적이라는 의도를 파악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한명숙, 곽노현 등 한나라당 반대파와 관련해 이런 일이 유난히 많으 걸 보면 그런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금 전달을 “세련되게”할 줄 몰라 그냥 쉽게 들통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검찰의 의도를 “표적”수사라고 “지레짐작”을 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곽노현 교육감의 2억원 전달이 대가성이었다고 지레짐작"하지 않게" 만들기란 굉장히 어렵다. 사실 이건 그냥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곽노현이라는 개인의 도덕성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보호하려고 하다보면 자칫, 곽노현의 개인과 함께 진보적 정책이 다 같이 쓸려내려가는 수가 있다. 오히려 실제로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도 성직자들과 불법주류상들이 뒤섞여 있고, 상대방 정당에도 성직자와 불법ㅈ류상들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국민의 수에서 수십퍼센트의 지지를 받는 거대한 조직이 “나와 정치적 목적을 같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거나, “나와 정치적 목적을 달리 한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먼지 구덩이에 사는 사람들의 집단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무상급식을 살펴보자. 무상급식이 확대되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물론 있다. 무상급식이라고 해서 급식 업체들이 무상으로 밥을 제공하는 게 아닌 이상, 급식 업체들로서는 급식 대상이 많아지는 무상급식 정책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면 급식 업체들이 무상급식 찬성을 위한 로비를 할까 안 할까? 거대하고 조직적인 로비는 있지 않더라도 어느 구석에선가 누군가는 “아이들 밥 먹이는 일이니 잘 풀리게 힘 좀 써달라”며 무언가를 주고 받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글쎄.

무상급식을 지지한 모든 사람들이 “모든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공평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순수한 목적만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무상급식을 제도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중요한 거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익집단이나 계층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고, 그들이 얼만큼의 발언권을 가졌느냐도 아니고, 그 정책이 사회 전체의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는가 아닌가이다.

미성년 노동을 주도적으로 반대한 세력이 이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해서 미성년 노동을 금지한 게 그 자체로 사회적 해악은 아니었던 것처럼, 곽노현 개인이 사적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펼치려했던 교육 정책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곽노현이란 인물이 성직자이냐 불법주류상이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불법주류상과 성직자는 공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은 항상 baptist라는 착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우리가 불법주류상이고 때로는 우리가 성직자다.(Bootleggers and baptists live everywhere, even inside us.) 그렇다면, 백년지대계라는 교육과 관련한 정책이 아무렴 곽노현 개인보다는 커야하지 않겠는가?

@ 이쯤에서 개인적으로는 곽노현 교육감은 사임을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행위의 의도가 무엇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려운만큼이나 나의 의도를 남에게 증명하기도 똑같이 어렵다. 박명기 교수에게 돈을 공개적으로 건내주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았던 것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그 행위가 어떤 의도를 갖고 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란 걸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이고, 그 행위 자체를 인정한 이상 도덕성에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 이거 갑자기 과학 블로그를 빙자한 정치 블로그가 돼 버렸는데, 이번 주중으로 “나의 과학은 이렇지 않아 16탄” 올라갑니다.


2011/08/29 10:10 2011/08/2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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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3구와 강남 3구민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8/25 07:37 최박사

§ Emergence

A부터 J까지 10종류의 과자가 있다고 해보자. 이중 A부터 E까지의 5개는 초콜렛이 들어간 단맛이 나는 과자고 F부터 J까지의 5개는 소금과 간장으로 맛을 낸 짠맛이 나는 과자다. 100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 3개씩을 골라보라고 한 후, 가장 인기가 많은 과자가 어느건지 1등부터 3등까지 순위를 매기기로 했다.

그 결과 D가 1등, A가 2등, E가 3등을 했다면, 이를 통해 이 조사에 참가한 100명의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단맛이 나는 과자를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 결론을 통해 100명 개개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느냐고 한다면 그 답은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다”가 된다.

D가 1등, A가 2등, E가 3등을 했다고 해서 이 100명의 사람들이 전부 자신의 투표용지에 A, D, E를 골랐을 리는 물론 없거니와 실제로 정확히 A, D, E 3개만을 고른 사람이 100명 중 과반수가 넘지 않을 확률도 다분하다. 또, 투표용지에 기록하게는 안 돼 있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의 순위를 매기라고 했을 때 정확히 D-A-E의 순서로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100명 중 극소수에 달할 것이고, 심지어는 그런 사람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게 바로 emergence 현상으로, 이렇게 발현된 집단적 성향이란 건 그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을 개별적으로 살펴봄으로써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고, 역으로 집단적 성향을 통해 그 집단 내의 개개인의 특성이 이럴 것이다라고 정확히 짚어낼 수도 없다.

§ 강남 3구 vs 나머지 서울

최근 선거나 투표만 했다고 하면 강남, 서초, 송파의 강남 3구와 서울의 나머지 지역 사이의 성향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이고, 이런 정치적 성향은 강남 3구의 소득과 생활 수준을 고려해보면 (자본에 의한) 계급성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집단으로서는. 따라서 서초를 비롯한 강남 3구민들이 집단적으로는 부자라서 투표율이 높다는 진단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렇지만 이는 “모든 강남 3구민들은 부자라서 투표를 했다” 또는 “투표를 한 모든 강남 3구민들은 부자다”라는 개인들에 대한 진단의 확장판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부자들이 사는 강남 3구”의 투표율조차도 그래봐야 1/3밖에 안 된다는, 즉 강남 3구민들 둥 2/3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맥을 같이 한다.

투표율이란 건 철저하게 통계에 기반한 집단에게서만 관측되는 지표로, 투표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2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개인들에 대해, 강남 3구의 투표율이 3X%이고 기타 서울의 투표율이 2X%라고 해서 강남 3구 주민들 개개인이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10% 포인트 정도 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법이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개인의 선택은 투표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두가지 중 하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개개인이 포함된 집단의 성택은 투표율 0%이거나 투표율 100%이거나 두가지 중 하나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투표율 0%부터 투표율 100% 사이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개인과 집단 사이의 차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부자들의 투표율

그래서 몇몇 개인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왜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집단적 성향이 없다”라는 이런 류의 기사는 뻘소리일 수밖에 없다.

기사 : “서초구민이 부자들이라 투표율이 높다고? 나도 우면산피해자 포퓰리즘 싫어서 했다”

특정 개인이 투표를 한 이유는 다양할 거다. “난 부자니까 투표를 해야지”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으로는 부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성향은 얼마든지 있다. B, G, J라는 과자를 특히 좋아한다는 건 단순히 개인의 특성이고 기호겠지만, 이들이 모여 단 과자를 좋아한다는 집단적 성향이 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면 이런 개인의 기호들이 몇개가 쌓여야 집단적 성향이 되는 걸까? 2명? 그건 아닌 것 같다. 3명? 그것도 별로. 그럼 5명? 글쎄. 10명? 어쩌면… 50명? 그래, 이정도면 거의…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개인의 기호가 집단의 성향으로 발현되는 지점을 분리할 수 있는 확실한 경계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냥 어느 시점에선가 집단적 성향이 보인다.

§ 강남 3구 vs 강남 3구민

그런데 이 경계가 불분명하다보니 우리는 양쪽으로 다 실수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100명 이상이 모이면 그 집단적 성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기준이 있다면 100이라는 매직넘버를 기준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한명 한명의 특성을 100명의 성향과 분리하는 게 보다 쉬울 거다. 그런데 그런 매직넘버가 없다보니 개인과 집단이 뭉뚱그려진다. 어떤 성향을 띄는 집단에 포함된 개인은 모두 비슷할 거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비슷한 성격을 가진 개인들이 모였을 때에만 그 비슷한 성격이 집단의 성향으로 발현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강남 3구의 선택”에 대한 원인 진단은 강남 3구민 개개인에 대한 원인 진단이 된다. 이 진단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진단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강남 3구의 선택과 강남 3구민 개개인의 선택은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은 꽤나 흔하다. 한국에서 기독교 집단은 호불호가 대단히 극명하게 갈리는 집단이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공격적인 전도와 비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행태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고 있고,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의 이런 거부감을 상당히 불편해한다.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비판/비난할 때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일부 극렬 기독교인을 보고 다수의 선량한 기독교인을 몰아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항변을 하는 이유는, 집단에 대한 비판을 집단에 소속된 모든 개개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비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비판을 하는 입장에서도 ’집단적 성향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집단내의 개개인을 비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그 둘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만 개개인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전혀 건설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싸움이 번지는 걸 막을 수 있다.

@ 사실 특정 집단의 특정 성향에 문제가 있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어도, 이를 변화시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emergence 현상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선택을 개별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한 집단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변화를 꾀해야 하는 것들은 개개인의 선택인지라, 이런 집단의 특성을 바꾸려면, 모든 개인이 내리는 개별적 선택이 바뀌어야 하는데, 개인의 선택과 집단적 특성 사이의 연결 고리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건 민감한 문제가 된다.

앞서서 단 과자를 좋아하는 100명짜리 집단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앞으로 D와 E의 2가지 과자는 먹지 말 것을 요구한다면, 집단 전체로 봤을 때에는 변화가 나타나겠지만, 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부담을 누가 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100명 집단 전체가 나눠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집단의 변화를 위해 이 부담을 D와 E를 유독 좋아하는 일부가 옴팡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되는대로…

@@ 앞서 소개한 항변성 기사가 나가는 건 “서초구민이 부자라서 투표했다”라는 이야기에 약간의 비판 내지는 비난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정 인구(demographic)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강남이 자본적 계급성을 띈다고 해서 그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2011/08/25 07:37 2011/08/25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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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과 인지적 오류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8/24 15:05 최박사

§ 있을 수 있는 일

무상급식 주민투표 투표율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우선 투표율 관련 기사 2개 소개.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똑같이 투표율이 낮은 상황을 놓고 한쪽에서는 "이래서 막판 투표율이 오를 수도 있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래서 막판 투표율이 오르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깐깐하게 따지자면 "오를 것이다, 오르지 않을 것이다"가 아니라 "오를 수도 있다,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했으니, 그리고 어느쪽의 확률도 0은 아닐 테니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0이 아니니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건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탕을 먹다가 자칫하면 사탕이 목에 걸려서 죽을 확률 역시 0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탕을 먹으려는 사람에게 "사탕을 먹다가 그 사탕이 목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여기에는 그다지 유용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투표율이 오를 수도 있다" 또는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발언을 굳이 하는 것은 화자가 이 발언이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많은 경우에 자신이 이런 일을 예견했다며 정세를 판단하는 안목이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기 위한—정보를 담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표집 편향

그런데 이런 발언이 실제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또 웃기는 게 똑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정반대의 결과를 예측한다면, 이게 실제로 예측으로서 얼마나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 할까? 흥미로운 건 언론의 정치나 경제 펀디트(pundit)란 거의 항상 이런 식이라는 점이다. (물론 정반대의 결과에 대해서도 사건 A는 이만큼의 확률로, 사건 B는 이만큼의 확률로 일어날 거다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의미가 있다.)

언론의 앞으로에 대한 정세 예측은 많은 경우에 과거의 사건들을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조사 분석하여 내놓기보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면 투표율이 오를 거다", "사표심리가 작동하면 투표율이 안 오를 거다" 따위의 직관과 감(hunch)에 그럴 듯한 이야기를 덧씌워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보니 동일한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데에도 전망은 다 제각각이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렙(Nassim Nicolas Taleb)이 신문을 보는 게 시간 낭비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비단 이게 언론만의 문제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사실 이 무상급식 찬반 논쟁의 뿌리를 캐보면 오세훈 서울 시장은 물론이고 이에 대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그리고 네티즌과 소시민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레벨에서 개인의 협소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직관과 감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는 일은 목격이 된다.

우선 "소득 양극화"와 "부익부 빈익빈"이란 말부터 살펴보자. IMF 이후로 우리 사회에 소득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나도 그런 것 같다는 인상은 조금 받는다. 그런데 이 인상이란 건 무척 위험한 물건이다. 내가 아무리 폭넓은 삶의 경험을 하겠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범위란 건 무척 제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표집 편향(sampling bias)의 위험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만 해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지 않고 단지 내 경험에 기반해 선거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면 오세훈은 서울 시장이 될 수 없었고, 이명박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오세훈이 서울 시장이고, 이명박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는, 내가 경험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세계, 오세훈과 이명박을 지지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내 판단 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이고, 그게 여론조사라고 하는 수집된 통계를 확인하는 거다.

§ 확증 편향

마찬가지로 강남에 급격하게 늘어나는 외제차와 한 단계 격이 다른 것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보면서 소외감을 느끼기는 쉽지만, 이런 소외감이 실제로 어느 정도가 부의 집중에 의한 효과고, 어느 정도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이런 삶이 우리에게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인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소득 양극화가 실재한다는 걸 어떤 과정을 통해 믿게 됐는지를 곰곰히 살펴보면 언론의 펀디트(pundit)들에게 휘들리지는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만 잘 굴려서 돈을 버는 사람들 이야기, 가난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해 아둥바둥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익부 빈익빈"이란 말의 힘이 실감나지만,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적 현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얼마나 통계와 자료를 축적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리 법칙과 같은 100%의 재연 가능성이 아닌, 경향성에 의존하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화 몇개는 별 다른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담배가 아무리 몸에 나빠도 "우리 할아버지는 90살이 넘어서까지 줄담배를 피우셨어"는 이야기를 찾으려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걸 상기시켜 보면 된다.

그리고 스스로들 곰곰히 생각해보면, 몇몇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소득 양극화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사람 중 대다수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대다수도 대부분 특정 개인이나 언론의 이야기를 재생할 뿐, 실제로 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직접 확인한 적은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사실 당연하다. 나만 해도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앞서 투표율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했듯이 언론의 펀디트(pundit)들이 얼마나 엉성하게 사람들의 사고를 유도하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꽤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설령 통계와 자료를 찾아볼 때조차도 우리는 실수를 한다. 경험과 일례들에 기반한 이야기들이 아닌 통계 자료들조차도 때로는 그 결과들이 중구난방이다. 소득 양극화에 대한 자료도 연구기관에 따라 실재한다고 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곳들이 있다. 이렇게 결과가 제멋대로라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자신들의 입장에 짜맞춘 연구 결과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때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가 개입하여 더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기존에 믿고 있던 결론에 일치하는 증거나 연구결과는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반면에, 그에 상충되는 증거나 연구결과는 그 증거 수집 과정이 잘못됐다거나,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갖고 수행한 객관성이 떨어진 자료로 치부함으로써 스스로의 믿음 체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을 말한다. 확증편향의 최대 아이러니는, 다른 사람의 사고과정에는 확증편향이 동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판단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확증편향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 인지적 결함과 복지 제도 보완하기

사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참 난감해진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오고 나면, 논리적으로 도달해야 할 결론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판단도 믿지 말아야 하니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어야만 할 것 같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진부한 탈출구이긴 한데, 그래도 역시 우리 사고 과정이 안고 있는 이런 종류의 결함을 이해해야만, 그나마 이를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고, 보다 생산적인 토론도 가능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한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기본적인 인지적 결함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있어야, 대한민국 혹은 서울시의 복지 정책의 강점(같은 게 있나? -_-a)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점검하고,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진단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상급식이 필요한가?"라는 국지적인 물음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복지 정책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이를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느냐는 논의로 옮겨가지 못한다면 사실 투표율이 1/3이 되던 말던, 오세훈이 물러나던 말던, 무상급식이 시행되던 말던, 진보진영이 일궈낸 것은 눈에 보이는 당장의 승리 말고는 거의 없다.

무상급식 논란을 통해 한국 사회 전체가 무언가 소득이 있었다고 말하려면, 우리 사회에 부의 집중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리고 일어났다면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일어났는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대한) 정확한 통계와 자료를 수집하고 이에 기반해서 논의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는 것과 이를 통해서 복지 제도를 정비하는 일일 거다. 복지 정책이란 부의 분포가 어떻게 돼 있는지에 따라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 지금 단계에서 그다지 현실성 있는 제안은 아닌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복지라는 게 교육, 의료, 출산, 실직, 노후보장 등등 다양하게 쪼개져 있다보니 복지 제도가 일종의 블랙박스가 돼 버렸다고 생각한다. 사실 복지의 관점에서 따지고 보면, 차별이 일어나는 곳은 소득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발생한 차별을 이것 따로, 저것 따로 다 차등적으로 메워주려다보니 정부의 장부와 기능은 복잡해지고, 개별 복지 정책 하나 하나를 손대려고 할 때마다 정치적 폭탄으로 돌변한다. 그러니 차라리 소득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에 집중하고, 누진세의 반대 개념으로 가족 단위의 누진적 소득 보장 제도 하나로 통일시키는 방법은 어떨까?

2011/08/24 15:05 2011/08/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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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에 주목하지 마라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8/17 05:30 최박사

영국의 폭동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얼마 전에 읽은 던컨 와츠(Duncan Watts)의 책〈Everything Is Obvious: *Once You Know the Answer〉에 이와 관련해서 한번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 있기에 조금(이라기엔 좀 많나?) 번역해 봤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는 폭동 직전의 군중에 대한 간단한 수학적 모델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강조하였다. 정부의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여 마을 광장에 학생 백명이 모였다고 해보자. 학생들은 새로운 정책에 대해 화가 나 있고, 정책 결정과정에 자신들의 입장이 좀처럼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만이 쌓인 상태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교육을 잘 받은 교양 있는 사람들인만큼 그들 역시 이성과 대화가 폭력보다 낫다는 걸 이해한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감이 있지만, 이 군중 중 개개인은 두가지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하자—한 가지는 정줄 놓고 이것저것 다 때려 부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 거다. 각각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이 두가지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폭력과 평화를 놓고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이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도 반응한다. 폭동에 참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의 행동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 가능성은 높아지고, 그들 중 특정 개인이 잡혀서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또, 폭동은 물리적 파손 행위를 제한하는 평소의 강력한 사회적 관습을 약화시키는 그 나름만의 원시적인 에너지가 있어서, 위험에 대한 심리적 분별력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폭동은 평소에는 분별 있는 사람도 미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평정을 유지할지 폭력에 가담할지에 대한 선택을 내리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폭동에 많이 참여할수록, 특정 개인이 이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일반적인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리 안에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개개인은 폭력에 대해 서로 다른 경향성을 갖는다. 더 부유하거나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덜 입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위해 굳이 감옥에 가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폭력이란 꽤나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정치적으로 유용한 도구라는 주장에 보다 쉽게 현혹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경찰이나 정치인 또는 사회 전반에 대해 이 이슈와 전혀 별개의 불만이 있는데, 이번 일은 그저 쌓인 불만을 터뜨릴 좋은 기회인 걸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맛이 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뭐가 됐든—이런 이유들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만큼 다양하고 복잡할 텐데—개개인은 자기만의 "한계점"을 갖고 있어서, 이 한계점보다 많은 사람들이 폭동에 참여하면 자신도 이에 합류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스스로 자제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소위 "대중 선동가"들—은 이 한계점이 아주 낮을 거고, 학생회장 같은 사람들은 아주 높은 한계점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평화에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사회적 영향의 한계점이 있다. 이는 개개인의 행위를 묘사하는 방법으로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커다란 무리의 사람들에 대해 그 개개인이 지닌 각각의 한계점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것의 장점은, 미친 사람("아무도 폭동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나는 폭력 시위를 하겠다")부터 간디("남들이 전부 폭동에 동참하더라도 나는 평화시위를 하겠다")에 이르는 집단내의 다양한 한계점 분포가 집단 행동에 대해 흥미롭고 놀라운 가르침을 짚어낸다는 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이기 위해 그라노베터는 각각의 사람이 고유한 한계점을 갖고 있는 아주 단순한 분포를 가정하였다. 딱 한 사람은 한계점이 0이고, 또 한 사람은 한계점이 1명, 다른 사람은 한계점이 2명, 이런 식으로 나가서 가장 조심스러운 사람은 나머지 99명이 모두 폭동을 일으킬 때에만 이에 동참하는 식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선 우리의 미스터 미친놈—한계점이 0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갖고 이것저것 집어던지며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한계점이 1명(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1명만 있으면 여기에 합류할 준비가 된 사람)인 그의 똘마니가 이에 동참할 거다. 이렇게 둘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세번째 사람—한계점이 2명인 사람—이 합류하고, 다시 한계점이 3명인 사람이 또 동참하고, 그러면 … 뭐, 어떻게 되는 시나리오인지는 알 거다: 이런 한계점 분포 하에서는, 한사람 한사람 차례로 폭동에 합류하면서 결국 시위자 전부가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카오스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런데 바로 옆 마을에 같은 이유로 같은 규모의 또 다른 무리의 학생들이 모였다고 해보자. 정말로 이렇기는 어렵겠지만, 이 무리의 학생들은 앞서 이야기한 첫번째 무리의 학생들과 거의 동일한 한계점 분포를 가졌다고 하자. 이 두무리의 한계점 분포는 너무도 유사해서, 그 차이는 딱 한 사람뿐이다: 첫번째 무리의 학생들은 모두가 0부터 99까지의 서로 다른 한계점을 가졌었는데, 이 두번째 무리에서는 한계점이 3명인 사람이 없고, 대신 한계점이 4명인 사람이 둘 있다. 바깥에서 봤을 때에는, 이 차이는 너무 사소해서 도저히 감지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신"을 자처하니까 이 차이를 아는 거지, 우리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심리 테스트나 통계적 모델을 이용해서는 이 두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실제로 이 무리의 집단 행동을 살펴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시작은 같다 :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스터 미친놈이 폭동을 선도하고 그의 똘마니와 한계점이 2명인 사람이 예외없이 동참한다. 그런데 거기서 암초에 걸린다. 왜냐하면 한계점이 3명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쉽게 선동되는 사람들은 한계점이 4명인 두 사람인데, 지금 폭동에 참가한 사람은 3명뿐이다. 그래서 잠재적 폭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두 마을의 이웃 동네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 두 마을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자. A마을에서는 여기저기 유리가 깨지고 자동차가 불에 타고 뒤집히면서 끝나는 대대적인 폭동을 보게 된다. 반면에 B마을에서는 몇몇 소란스러운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시위자들을 이리저리 밀치고 다니는 걸 볼 거다. 이 관찰자들이 나중에 노트를 비교할 때, 이들은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나 그들의 환경 중 도대체 무엇이 달랐던 걸지를 밝혀내려 할 거다. A마을 사람들이 B마을 사람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화가 나 있었거나 더 절박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상점들이 더 허술하게 대비돼 있었거나, 아니면 경찰이 더 공격적이었거나, 아니면 A마을에 말빨이 좋은 선동가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게 상식적인 설명들이 될 거다. 분명히 무언가 차이가 있었던 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극도로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딱 한 사람의 한계점을 빼면,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나 그들의 환경에는 아무런 차이거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표적 요인(representative agent) 모델로 A마을과 B마을에서 벌어진 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마을 주민의 평균적인 특성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야만 하는데, 우리가 가정한 시나리오에서 평균적인 특성에는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와츠의 이야기는 우리가 폭동과 같은 개별 사건 기저에 깔린 원인(underlying cause)이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게 어려운만큼이나 얼마나 부질없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폭동과 같이 심각한 수준의 사회적 불안정이 있었다면 그 기저에는 에 상응하는 심각한 수준의 사회적 문제가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인식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런 사회적 문제가 실제로 폭동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이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어뚱한 결론을 도출하게 만든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폭동이 일어난 곳에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여기는 도대체 뭐가 특별했던 걸까?"를 고민하는 것보다 그 전에 다양한 경로로 표출되는 사회적 불만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안 그러면 맨날 소 잃고 외양간만 고치고 앉아 있게 될 거다.

2011/08/17 05:30 2011/08/1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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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비교적 과격한 폭동이 벌어진 가운데, 이를 대하고 보도하는 언론사들의 태도들을 비교적 잘 정리한 글부터 하나 소개해보자.

영국 폭동, 격이 다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

이를 보면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인과관계와 전후관계를 혼돈하는 오류(Post hoc ergo propter hoc)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몇개월에서 몇년간 벌어진 사건들 중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들만 순서대로 추리는 것 외의 근거라고는 별로 없이 이번 폭동에 대한 원인 등을 분석하여 기사와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최근의 무상급식 논란과 맞물려 “복지정책의 부재”를 지적해온 한겨례나 “과도한 복지정책”에 브레이크 걸 껀수(?)를 찾던 조중동이나 이번 폭동을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기회로 보고 있다는 거다. 팀 하포드(Tim Harford)트위터를 통해 이번 영국 폭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 꼬집은 적이 있다.

The riots are clear confirmation of my long-held view that [insert pre-existing worldview here]. Or so various people seem to be saying.

복잡한 사회적 원인들이 얽혀서 나타나는 현상은 많은 경우에, 이렇게 끼워맞추면 이렇게 설명이 되고, 저렇게 끼워맞추면 저렇게 설명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이 옳다는 것에 대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걸 지적한 거다. 이는 이런 논평을 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읽고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때마침 Center for Economic Policy Research에서 긴축재정과 폭동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 있으니 한번 살펴보자.

AUSTERITY AND ANARCHY: BUDGET CUTS AND SOCIAL UNREST IN EUROPE, 1919-2009 (제목을 클릭하시면 pdf 화일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논문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논문은 실제로 재정긴축이 사회적 안정을 해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We demonstrate that the general pattern of association between unrest and budget cuts holds in Europe for the period 1919-2009.

이것만 보면 조중동의 "복지랍시고 재정지출을 키우는 걸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논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80년대 들어서는 이런 재정긴축과 사회적 불안 사이의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The fall of the Berlin wall saw the spread of Western-style democracy eastwards. The overall connection between austerity and social instability now changes sign, and becomes in insignificant.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의 한마디 정도가 전부라 아쉽지만, 복지국가의 급작스런(?) 재정긴축에 이번 폭동의 화살을 전부 돌릴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This suggests to us that non- economic causes became a dominant feature of the period.

소위 과학 블로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는 걸 따지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는 자신이 바라보는 그 시각이 세상을 정말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듯하기 때문에, 그런 시각을 쉽게 버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누군가가 어떤 사태에 대해 옳바른 해석을 내릴 때조차 어쩌다 운이 좋았던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다.

세상사를 간편한 원인과 결과로 나눈다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조금 더 복잡하기 때문에, 내가 세상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든, 나의 믿음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헛점투성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이번 일을 통해 다들 또 한번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 Hat tip to Economics Intelligence

@@ 이쯤에서 잠시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만 하자면, 나는 대한민국의 조세 부담율도 조금 더 올라가야 하고 복지예산도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과도한 복지정책”에는 반대한다.

여기서 “과도하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하는데, 소득 분배의 구조상 소득의 평균(mean)과 전체 인구의 소득 중간값(median)이 엇비슷하다면, 국가가 중산층에게 복지를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이럴 때 복지란 최상층의 소득 일부가 최하층에게 분배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하고, 이를 중산층에게까지 분배하려는 건 자멸적(self-defeating)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소득의 평균(mean)이 전체 인구의 소득 중간값(median)보다 높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는 국가 전체의 부가 상위 계층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징후로, 이 경우에 복지정책은 철저하게 최상층의 소득을 국민 대다수에게 분배함으로써 소득 분배의 구조 자체를 정상화(?)시키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복지정책이라고 다 같은 복지정책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런데 이런 차이에 대한 논의는 없이, 복지정책을 펼치면 국가재정이 파탄난다는 공식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국가재정의 파탄이란 그 돈을 뭐에 썼느냐와 관계없이 세금으로 벌어들인 돈보다 쓴 돈이 많으면 발생하는 거지, 세금과 국가재정을 빨아먹는 복지라는 블랙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2011/08/14 17:48 2011/08/1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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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없어!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8/10 09:26 최박사

요새 쓰고 싶은 글들이 밀렸는데, 괜히 정신없이 바쁘군요, 흑흑흑. 이럴 땐 잽싸게 번역이나 하나 해서 올리는 수밖에... 로버트 크럴위치(Robert Krulwich)의 블로그 Krulwich Wonders...에 실린 글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Mark Changizi의 책 〈The Vision Revolution: How the Latest Research Overturns Everything We Thought We Knew About Human Vision〉을 보면 착시에 대한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번역문 나갑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아래 제목을 클릭.

This Can't Be Happening

여러분께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없다면 내가 여러분 머리를 잠시 갖고 놀도록 하겠습니다.

자, 아래에 평행사변형으로 구성된 두개의 원이 있습니다. 정가운데에는 점이 하나 있고요. 점에 시선을 집중하고 머리를 앞뒤로 움직여 보세요.

Here is Pinna-Brelstaff Illusion. If you focus on the dot and move your head in, then move it out the circles spin.
B. Pinna

이상하지 않아요?

두원이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 원들이 정말로 도는 건 아닙니다; 평행사변형 중 하나에 시선을 집중하면 머리를 하루 왠종일 앞뒤로 움직여도 그 평행사변형은 꼼짝도 안 할 겁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전 이 원들이 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주겠다는 안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엄밀히 말하면 뉴욕 주립대학교의 검안대학의 벤 바커스(Ben Backus)라는 "시각 과학"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네, 그에 따르면, 여러분이 보고 있는 건 구라(고상하게 말하면 "착시"라고 하죠)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눈을 비난하지는 마세요. 대신 여러분의 뇌를 비난하십시오.

뇌를 속이기

"우리는 움직임(motion)을 직접 관찰하지 않습니다"라고 그가 말해줬어요.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눈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뇌가 없다면 아무것도 못 봅니다. 컴퓨터 모니터의 이 원들은 바인죠 피냐(Baingio Pinna) 박사가 디자인한 건데, 여러분 뇌의 아주 특화된 세포를 속이게 돼 있습니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분이 머리를 앞뒤로 움직여야 했던 거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머리를 앞으로 움직이면 화면의 원들이 더 크게 보이겠죠. 여러분의 뇌는 "저 원들이 더 가까워지고 있어!"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뇌에는 움직임을 감지하는데 특화된 세포들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이 원들이 더 커져 보이는 것을 눈치채야 하죠. 문제는 각각의 세포 하나하나가 볼 수 있는 영역은 많지 않습니다. 이 세포들은 선창(porthole: 항공기나 선박의 작은 창문)과 비슷합니다: 그 세포들은 바깥 세상의 아주 작은 영역만을 "봅니다".

이런 선창들을 많이 모아놓으면, 바깥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죠. 피냐 박사는 굉장히 똑똑한 양반입니다. 그는 이 세포들이 거짓말을 하게끔 유도하는 방법을 찾아냈거든요.

여러분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를 보면 서서히 커지는 원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 보고 있진 마세요, 멀미나 어지럼증이이 날 수 있으니까요.)

이제 이 그림에 대고 마우스를 클릭하세요. (이 그림은 Adobe Flash Player version 9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최신 Flash Player를 받으세요.)

Source: Ben Backus/SUNY Optometry
Credit: Christina Baird, Nelson Hsu/ NPR

움직이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선창이 나타날 겁니다. 다시 한번 클릭하면 선창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 커지는 원이, 어려분의 "국지적인" 움직임 감지 세포와 비슷한, 선창들 몇개만 남겨놓고 가려집니다. 이 작은 선창들을 통해 보이는 것이 여러분의 세포가 보는 것인데, 여러분이 한발짝 물러서서 이 선창들을 한꺼번에 바라보면, 그림이 커지기보다는 회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속임수가 뭔지 알겠습니까?

이제 이 선창들을 보고 있으면, 그 밑의 그림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피냐 박사의 비밀병기는 그의 정확한 사선들이라고 합니다. 그의 평행사변형들은 아주 선명한 그늘이 진 사선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다소 복잡한데, 그 평행사변형의 각도가 뇌의 상위에서 회전하는 것처럼 판단하게 만듭니다.)

신경과학자들이 광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서 아주 기민한 신경세포들마저도 속여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보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니, 저는 이게 정말 굉장하단 생각이 듭니다. 이 속임수는 정말로 효과적이거든요. 여러분이 여러분 뇌에 "이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실제로 일어납니다.

바커스 박사는 "여러분의 시각 체계로 하여금 생각을 고쳐먹게끔 한껏 설득해보십시오, 마음대로 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각 인식은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어요. 안 그래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장난감 세개가 더 있습니다. 전부 피냐 박사의 작품들이죠. 움직이는 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세요. 그러면 주변의 물체들이 이동하거나 꿈틀대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죠. 그렇지만 여러분의 거짓말쟁이 뇌가 그것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 현상과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을 공부하고 싶은 분들은 데이비드 버르(David Burr)와 피터 톰슨(Peter Thomson)의 논문, Motion Psychophysics 1985-2010 in Vision Research (2011)을 참고하세요.

2011/08/10 09:26 2011/08/1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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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허 트롤, 인털렉츄얼 벤쳐스

미국 최고의 인기 파드캐스트This American Life의 지난주(7.22) 방송분은 “When Patents Attack!”이란 제목의 에피소드였다. 현행 특허제도가 얼마나 악랄하게 이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허 분쟁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일청을 권한다.

아무튼 이 에피소드에 보면 네이쓴 미르볼드(Nathan Myhrvold)인털렉츄얼 벤쳐스(Intellectual Ventures)라는 라이센싱 회사가 도마에 오른다. 특허를 생산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으면서 특허”권”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발목만 잡는 부류의 사람들을 특허 트롤(patent troll)이라고 하는데, 인털렉츄얼 벤쳐스 같은 경우 업계에서 조직적인 대규모 특허 트롤로 통한다.

흥미로운 건 실제로 인털렉츄얼 벤쳐스에 다니는 내부자들의 시각이다. 회사의 설립자이자 CEO인 미르볼드는 물론이고, 이 회사의 사원들은 모두 좋은 교육을 받았고, 똑똑하고 세련된 감각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외부의 이런 시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우에도, 자신들의 행태가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소속 집단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충성심을 보인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유효과(endowment effect)의 일종이다. 소유효과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론적 오류(cognitive bias)의 하나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 소유효과

이 이야기만 들어서는 “무언가를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걸 소유한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여기서 말하는 소유효과란 그런 게 아니다. 이를 증명(?)한 대표적인 실험을 잠시 살펴보자면,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그룹으로 나눈 후 한 그룹에만 어떤 물건을 준다. 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몇천원짜리 티셔츠나 머그잔 따위면 된다. 그리고 두그룹 사이에 이 물건을 거래하라고 하면 이 거래는 거의 성사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미 물건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부르는 값이, 이를 사려는 학생들이 지불하려는 값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그룹으로 나눴다는 게 중요하다. 예전부터 그 물건, 예를 들어 티셔츠를 새로 한벌 살 생각이었다거나, 다양한 머그잔을 모으길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그에 맞춰 물건을 준 게 아니라, 무작위로 고른 학생들에게 무작위의 물건을 줬음에도, 이들이 이런 물건들을 받고 나니 이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고 이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됐다는 게 소유효과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데, S모사와 L모사 둘을 놓고 고민하던 취업 준비생들 중, 취직이 되기 전부터 둘중 하나에 대해 강력한 선호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어느 회사라도 붙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사명감에 빠져서 취직전부터 “나의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라며 어떤 한 회사 취직 서류만 준비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정작 취직을 한 후에는, 어쩐 일인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경쟁사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설령 객관적으로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매우기 위해 회사가 부단히 노력 중이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느끼거나, 아니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점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사람들이 세뇌가 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직원들이 실제로 회사나 회사지분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회사를 내 직장으로 여기는 이상 소유효과가 발생해서 나타나는 일이다. 물론 세뇌를 전혀 안 시키는 건 아니지만, 세뇌가 그렇게나 효과적으로 동작하는 이유는 이런 소유효과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털렉츄얼 벤쳐스를 다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비지니스 모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들이 외부인들보다 특별히 악랄하거나, 돈을 밝힌다거나, 아니면 멍청해서 특허권을 긁어 모으고 이를 이용한 분쟁을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인털렉츄얼 벤쳐스에 대한 소유효과가 작용하면서 외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길 건너기

여기에 인간의 의도치 않은 위선도 한몫을 한다. UPenn의 심리학자 로버트 커즈반(Robert Kurzban)은 자신의 책 〈Why Everyone (Else) Is a Hypocrite: Evolution and the Modular Mind〉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한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 하면 차들이 잘 서준다. 특히 보행자가 운전자와 눈을 마주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한다. 내가(보행자) 길을 건너려 한다는 걸 너가(운전자) 봤으니 차를 서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UPenn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는 이러다가는 차에 치여 죽기 딱 좋단다. 그 이유인즉슨 이렇다. 차와 사람이 충돌하면 누가 손해일까? 당연히 사람이다. 따라서 차가 오는 걸 아는 보행자라면 무조건 차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운전자와 눈을 마주쳤다는 건 보행자도 차가 오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보행자는 당연히 길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운전자는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길을 건너려면 차가 오나 살피지 말고, 길을 잃고 헤매면서 앞뒤 분간이 안 가는 사람마냥 길을 건너란다. 한마디로 “관광객처럼 보이면” 좋단다. 도저히 차를 피할 방법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만 차가 멈춰준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차가 온다는 걸) 모르는 게 약이고, 무지가 힘이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내가 모른다는 걸 상대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다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 정말로 모르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모든 걸 알기보다는 일부러 모르는 게 있게끔, 인간은 때로는 멍청하고,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위선적이게끔 진화를 했다는 것이 커즈반의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걸 정말 모르는 게 가능한가” 싶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뭔지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 위선과 책임 회피

커즈반과 같은 UPenn의 제이슨 데이나(Jason Dana)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일이 있다. 한 무리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선택권을 준다. 참가자는 참가자 자신과 참가자는 모르는 제3자가 각각 5달러씩 받거나, 참가자는 6달러, 제3자는 1달러를 받는 것 중 한가지를 택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선택에 따라 돈을 지급받는다. 이 경우 실험 참가자의 2/3 이상이 자신의 1달러를 희생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5달러를 받는 선택을 한다.

자, 이번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참가자들에게 선택권을 준다. 자신이 5달러를 받을지, 6달러를 받을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제3자는 참가자의 선택에 따라 1달러를 받을 수도 있고, 5달러를 받을 수도 있다. 다만, 5달러/5달러, 6달러/1달러의 지급 비율이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 5달러/1달러, 6달러/5달러일 수도 있는데, 선택권자는 이 네가지 경우 중 어느 게 걸릴지 모르는 거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당연히 6달러를 받겠다고 선택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위와 동일한 상황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5달러와 6달러를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제3자가 얼마를 받을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면 실험 참가자들은 어떻게 할까? 이를 미리 확인하고 제3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택을 할까? 아니면 그냥 자신이 6달러를 받는 선택을 할까? 절반 정도의 참가자는 이 사실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것과, 실제로 피해가 갔다는 사실을 아는 건 다르기 때문이다.

인털렉츄얼 벤쳐스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로 인해 특허 트롤이란 별명을 얻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외면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상황(deniability)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이를 위선이라고 욕할 수도 있지만, 앞서 예를 든 실험에서 살펴봤듯 우리 중 절반 정도가 이렇다면, 도덕성의 경계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애매해진다.

§ 조직과 개인

마지막으로 조직과 개인이 지닌 특수한 관계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더욱 복잡해진다.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같은 개념이 요새 널리 사용되는데, 이 특수한 관계란 집단 지성보다 더 넓은 범주의 emergence 현상과도 연관이 있는데, 여기서 핵심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조직이 특정한 의도를 갖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개개인 모두가 그와 연관된 의도를 갖고 행동하는 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개미왕국(ant colony)이다. 개미 한마리 한마디를 살펴보면 엄청나게 멍청하다. 큰 그림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이 페로몬에 반응하여 기계적으로 자기 일을 수행할 뿐이다. 한마리의 개미는 이 험한 세상에서 스스로 생존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왕국은 그 개개인의 개미를 모두 생존시킬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조직으로 동작한다. 개미 한마리의 특성을 통해 개미왕국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고, 개미왕국을 이해함으로써 개미 한마리가 어떤 특성이 있을 거라고 예측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인털렉츄얼 벤쳐스를 바라볼 때,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을 본다. 특허권을 다량으로 사들이고,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특허권을 조금이라도 침해한 사람/기업이 없는지 쥐잡듯이 색출해내고, 이를 법정 분쟁으로 끌고 가거나, 그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합의금을 뜯어내는 행위에서 “(다소 악랄한) 특허권 분쟁을 통한 기업 이윤 추구”라는 목적과 그 목적을 조직적으로 실천하는 실체를 보는 거다.

그런데 조직의 내부에서는 특히 조직이 크면 클수록, 통일된 목적을 갖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보다는 그 조직을 구성하는 개개인, 나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이 눈에 띈다. 물론 직장 동료들 중에 맘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자신의 직장 상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직이 가진 문제점을 이해하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거지 같은 직장 상사와 비효율이 넘처나는 조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런 점들 때문에 같이 고생하고, 같이 직장 상사 뒷다마를 까는 직장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전혀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개개인의 삶, 상사한테 신나게 까이고 와서도 “더러워도 어쩌겠어, 밥 벌어 먹으려면 집어치울 수는 없잖아?”라고 푸념하는 삶들을 보면서 이들이 전부 거대한 음모에 가까운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특허권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는 개개인이 모여 그 “권리”를 지켜내는 과정에서 특허 트롤과 같은 부당한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판단하거나, 그런 이미지가 완전히 부당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갖고 행한 행동들의 피할 수 없는 부작용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외부인은 개미왕국의 단점을 보고 있는데, 내부인은 개미의 장점을 보고 있을 뿐이라면 서로 이야기가 될 리 만무하다.

§ 비난과 비판의 사이

네이트의 개인 정보 유출 사건도 이런 인텔렉츄얼 벤쳐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있다. 기업의 나태함 때문이든 무지함 때문이든 3500만명의 개인 정보가 유출됨에 따라, 이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네이트의 다소 미온적인 태도와 성의없(어 보이)는 사과에 열을 내기는 쉽다. 그렇지만 문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우리 모두에게 숨어 있는 인지론적 오류들이 동작할 여지는 커진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바퀴벌레가 나온 것을 보고 소란을 피우면 주인이 정말 미안해하며 변상(?)을 받을 수 있지만, 새X깡에서 쥐머리가 나오면 온 언론이 나서서 두드려대도 기자회견을 통해 N사의 이상한 해명을 듣게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는 N사의 운영진이나 근로자들이 특별히 부도덕하거나, 나태하거나, 아니면 이 사람들은 쥐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먹고 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심리적)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과 실수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고,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치만은 여전히 인정받기를 바란다. 누구나 다 그러니까 이번 일을 비롯해 어떤 실수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닌 이런 약점들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문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짚어내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거다.

이번 사태는 네이트 혹은 SK컴즈라는 특정 회사만이 아니라,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어쩌면 네이트는 폭탄 돌리기를 하던 와중에 때맞춰 터진 폭탄을 들고 있었던 것 뿐일 수도 있다. 이게 SK컴즈라는 일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 SK컴즈를 격리 또는 고립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기업 기밀을 공개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금 더 투명하게 밝히는 게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리가 단지 그들의 잘못을 질타하는 꼰대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과 같이 고민하는 파트너임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우리 중 그 누구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었단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이번 문제를 지적함에 있어서 더 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일개 조직이나, 그 조직을 구성하는 개개인을 맹렬히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특정 개개인이 상처를 입지 않게끔 문제의 틀을 짜고, 언어를 선택하는 조심성 역시 필요하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한 지적을 개인(또는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만든다면 상대방은 자신의 오류를 깨닫더라도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같은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그 누군가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실수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박탈하는 건 아니다.

지하철에서 실수로 다른 사람의 발을 밟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쏘시오패쓰를 제외하면)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발을 밟힌 사람에게 사과를 한다. 그렇지만 발을 밟힌 사람이 지나치게 분에 넘쳐 과도하게 반응하면 사과할 마음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거다. 이런 사과할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공동의 인식보다도 사과를 받는 사람의 태도에 더 민감하다는 것, 이걸 이해한다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건설적인 역할"이 무언지도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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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콜드님의 글에 트랙백. 뭐 꼭 그 글에 연관성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읽고 나서 평소에 하던 생각을 한번 정리해야겠단 결심이 선 김에... -_-a 이 이야기는 물론 수해에 대한 서울시의 책임을 묻는 우리의 태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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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5 23:58 2011/08/0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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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끝나고 채널을 돌리다 MBC 뉴스에서 몇몇 화장품에 대한 허위 광고 사례가 적발됐다고 한다. 잠시 검색을 해보니 뉴스 기사도 오늘 내내 쏟아져 나왔었네.

다음 뉴스 검색 : 화장품 허위 광고

로레알의 비오템 셀룰리 레이저(Biotherm Celluli Laser)를 필두로 셀룰라이트 제거 내지는 살 빠지는 화장품이라고 광고를 해댄 모양. ㅋㅋㅋ

늘어진 뱃살을 탄력 있게 잡아주니깐 매일 30분 운동한 듯 한결 가벼워져요.

비오템 셀룰리 레이저 비키니 코드에 삽입된 광고 문구라는데, 정말 대박일세. 물론 “살이 빠진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소비자가 무슨 생각을 하길 원하는지는 꽤나 분명해 보인다. 이쯤에서 의문은 도대체 뭘 하면 화장품이 살을 빼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우리는 음식물을 통해 에너지를 흡수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에너지를 소비한다. 흡수하는 에너지가 소비하는 에너지보다 많으면 살이 찌고, 소비하는 에너지가 흡수하는 에너지보다 많으면 살이 빠진다. 그래서 살을 빼는 방법은 원칙적으로는 간단하다. 어떤 형태로든 소비하는 에너지를 흡수하는 에너지보다 키워야 한다. 먹는 걸 줄이거나 굶으면 흡수하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운동을 하게 되면 소비하는 에너지가 많아지기 때문에 살이 빠진다.

그게 아니라면 감량(살을 빼는 것과는 다르다)의 방법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 중 일부를 물리적으로 제거를 해야 한다. 실제로 몸에서 지방을 빼내는 지방 흡입 수술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가 좀 그로테스크하다만, 사고로 팔을 잃으면 팔의 무게만큼 감량이 된다. -_-,, 그렇지만 화장품에 사람 몸을 파먹는 벌레라도 들은 게 아니라면 화장품이 이런 식으로 살을 빼는 걸 도와줄 수 있을 리 없다.

지방을 분해한다는 이야기들도 하는데, 화장품의 무슨 성분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지방만 분해할 수 있는지 궁금할 뿐만 아니라, 설령 지방을 분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방을 몸이 사용하기 조금 더 쉬운 에너지원으로 바꾼다는 의미일 뿐, 우리 몸이 그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살이 빠지려면 이 에너지원을 소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운동을 해야 한다.

과학 특히 생물학은 암의 원인과 치료가 무언지를 밝혀내는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살을 빼기 위해서는 먹은 것보다 더 많이 움직이라는 단 한가지 원칙 밖에 없다는 간단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이 우리가 이미 먹은 음식을 먹지 않은 것 처럼 만들거나, 하지 않은 운동을 한 효과를 낼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한다면, 화장품으로 살을 뺄 수는 없다, 도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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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23:13 2011/08/0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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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행복 = 성취 / 욕구” 뭐, 이 비슷한 공식이 떠돌아다니던 시절이 있다. 수학/과학의 발달로 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정량화를 통한 비교 가능한 과학적 외형에 대한 선망? 동경?이 만들어낸 우스운 풍경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개인의 행복을 정량화할 수 없다고 믿지는 않는다. 특히나 최근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 대한 기계적(?) 원리를 이해하는데 한발 더 다가섬에 따라 어떤 개인이 어떤 상황에 느끼는 감정의 종류와 강도(?)를 다른 개인이 그와 유사하거나 (어쩌면 전혀 다른)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의 종류와 강도에 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어떤 감정과 그 감정의 구성요소(?)를 분해하는 환원주의적 접근이 올바른가는 고민해봐야겠지만, 오늘날 과학이 환원주의에 상당히 의존하는만큼 이런 접근에서 출발하게되는 경향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 예를 들면 공포를 다양한 구성요소로 나누고 그 구성요소들의 기여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게 그 자체로 과학적 접근이 되는 건 아니다.

며칠전 한겨레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기사 : 영화 ‘공포 수치’ 계산하는 수학공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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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학동아

원래 출처는 수학동아인 것 같은데, 아무런 맥락없이 “영국 킹스대(London의 King’s College) 수학팀이 만든 공식”이라고 소개를 하면, 이런 기사를 접하는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이 공식에 부여돼서는 안 될 권위가 생겨버린다.

약간의 구글링을 통해 내가 찾아낸 내막은 이러하다. 무려 7년전인 2004년 8월 가디언지에 실린 이 기사가 소스다. 참고로 이 기사는 가디언 과학면이 아니라 영화면에 소개됐었다.

기사 : Music + chase scenes = new formula for fear

기사 내용에 따르면 킹스대 수학자 몇몇이 스카이 무비(Sky Movies)라는 업체로부터 위탁을 받아 2주 동안 엑소시스트트,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양들의 침묵 등의 공포 영화 몇개를 본 후에 공포 영화의 무서운 정도를 나타낼 수 있는 공식을 뚝딱 만들어낸 모양이다. 추측컨대 스카이 무비는 공포 영화 마케팅에 쓸 등급을 매길 방법을 원한 게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런 종류의 마케팅에 크게 반대하지도 않고 (게다가 반대한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 원래 이승엽과 이대호 중 누가 더 짱인지, 역대 최고의 축구팀은 어느 시대의 어느 팀인지 따위의 별 되도 않는 이슈로 등수매기는 일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한, 이런 식의 짝퉁 정량화를 하면서 노는 것에도 불만은 없다.

다만 이런 기사를 스카이 무비라는 엔터테인먼트 배급 업체의 사주(?)를 받았다는 내용을 쏙 빼놓고, 대신 “통계프로그램을 이용해 분석했다”는 내용을 담은 후에 “과학면”에 실어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 우리가 어떤 영화를 무서워하고, 왜 그런 영화를 무서워하는지 알고 싶다면, 공포의 요소를 쪼개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쪼갠 공포의 요소들이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공포에 어떻게 얼만큼 기여하는가는 수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없다. 앞선 공식이 별다른 "과학적 가치"가 없다는 건 킹스대 수학자들이 제일 잘 알 거다.

어떤 미술 작품의 가치를 밝혀내기 위해 화학자들에게 의뢰를 했더니, 어떤 그림에 사용된 물감의 성분 조사를해서 거기에 희귀금속 성분이 얼마나 섞여 있더라를 토대로 미술 작품의 가치를 매겨서 알려줬다면, 이걸 예술의 과학적 가치라고 해야할까?.

공포의 과학을 수학자들에게서 찾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공포의 요소를 어떻게 나누던 간에 결국에는 그런 요소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철저하게 사람 머리와 몸에서 실제로 생리학적(physiological) 반응을 일으키느냐 여부에 따라 구분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생리학적 반응의 종류와 정도를 이해함으로써만 “공포의 공식”이 탄생할 수 있다. 이러지 않고 나온 공식들은 과학적으로는 다 쓰레기다. (Anything short of this makes any resulting formula bullshit.)

아무리 복잡하고 그럴 듯한 수식을 써놔도 “행복 = 성취 / 욕구”라고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수식이나 그래프를 사용한다고 저절로 과학이 되는 건 아니다. “과학적 외향”과 과학은 분리되어야 한다. 과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수학/과학은 복잡하고 어렵다며 수학 공식만 봐도 이를 외면하는 대중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KISTI수학동아든 정말 과학대중화의 디딤돌이 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학의 흥미진진함을 알리는 것보다는 그 차이, 과학적 외형과 과학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시키는 게 순서다. 그 차이를 대중이 이해하지 못할 때, 대중화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탈을 쓴 미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부터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Be careful what you wish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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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진진한 "진짜"과학은 많이 있다. (There is plenty of interesting real science we can draw people's attention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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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11:10 2011/08/0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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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에 썼던 글 재탕.

오늘 교수님 만나서 지난 월요일에 submit한 논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일부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이거 수정하는 건 내가 하지, 뭐. It's secretarial."이라고 하시는 거다. 내가 아는 한국의 많은 교수들과는 정확히 반대의 사고 아닌가! (물론, 한국에도 훌륭한 교수들이 없지는 않다.) 학생을 자기 비서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은 필히 반성 좀 해야 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우리 지도 교수님만큼 훌륭한 교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지도교수님 정도되려면, 교수로서 학생을 대할 때 한 순간 방심해서 잠깐이라도 학생을 만만하게 생각한다면 안 될 것 같으니 말이지. (그런 고민은 교수도 아닌 댁이 지금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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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3 09:22 2011/08/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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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점 잇기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8/02 11:04 최박사

자, 우선 지난 번 퀴즈의 정답부터 살펴볼까요?

많은 분들이 맞춰주셨는데요, 약속대로 세분을 추첨하여 제 맘속으로 칭찬해드리겠습니다. 멍청~ -_-,,

그러면 오늘의 퀴즈 나갑니다. 아래와 같이 9개의 점이 있습니다. 펜으로 선을 그려야 하는데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펜을 종이에 한번 대는 순간 펜을 종이에서 떼지 않고, 한번 그린 경로를 되돌아가지도 않으면서 9개의 점을 모두 통과하게끔 직선 4개를 그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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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면 되는 건데, 이 그림은 직선 5개가 사용됐기 때문에 정답이 아닌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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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문제라 정답을 댓글로 달기 쉽지 않을 테니, 댓글 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링크를 걸거나 해서라도 댓글에 그림을 넣을 수 있는 요령이 있으신 분들은 역시나 비밀댓글로 답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정답을 아시는 분은 리플은 안 달더라도 클릭

2011/08/02 11:04 2011/08/0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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