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은 약 0.4에서 0.5초만에 18m 정도 떨어진 포수에게 도달한다. 야구공은 0.1초에 약 4-5m를 이동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투수의 손에서 공이 빠지면서 포수를 향하는 대신 타석에 서 있는 타자의 머리를 향해 공이 날아가고 있다고 해보자.

저 공이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면 피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떤 사물에서 나오는 빛이 사람의 시신경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그 사물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약 0.1초, 또 뭔가를 보고 몸이 다시 그에 반응하기까지는 또 약 0.1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가 아닌 타자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위해 야구공의 궤적을 0.2초 정도 바라봤다면, 실제로 공은 이미 0.3초를 날아왔다는 이야기이고, 그 공을 보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에 공은 이미 타자 머리통에 박혀있게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물론 때로는 투수가 던진 공에 타자가 맞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공이 타자쪽을 향해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타자들은 제법 잽싸게 잘 피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신경학자인 Mark Changizi는 자신의 저서 <The Vision Revolution>에서, 인간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인간의 뇌는 어떤 사물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한 순간에 대한 그 사물의 위치와 속도 정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약 0.1초 후에 그 사물이 어디쯤 가 있을 것이고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를 미리 예측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시신경과 뇌가 신호를 처리하는 0.1초의 딜레이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에 사물이 0.1초 전에 어디 있었는가가 아닌, 현재에 어디 있는가를 인식한다는 이야기.
이런 미래를 예측하는 시각의 진화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맹수를 피하고, 먹잇감을 사냥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냥감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하는 시점에 그 사냥감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 빛이 뇌에 전달되어 사냥감을 인식하는 시점에 사냥감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은 꽤나 분명해진다. 맹수나 먹잇감에서 나온 빛이 눈에 도달하는 순간의 위치 정보를 뇌가 정직하게 인식했다면, 인류는 맹수에게 죄다 잡아 먹혔거나, 사냥에 실패해서 굶어죽었을 거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우리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이건 그냥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여기는 과학을 논하는 블로그잖아? 증명을 해야지, 증명을. 실제로 지금 영국 서섹스 대학에 있는 Romi Nijhawan 교수는 1990년대에 실험을 하였다. 어둠속에서 공이 굴러가는 가운데 공이 플래쉬 옆을 지나는 순간 플래쉬가 번쩍인다. 그런데 우리 눈과 뇌에는 플래쉬가 번쩍이는 순간 이 공이 플래쉬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아래 그림처럼 공이 플래쉬를 이미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즉, 인간의 시각은 움직이는 대상체의 위치와 속도를 예측하여 인식하게끔 최적화되어 진화해 왔다는 거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시각은 정지해 있는 이미지를 프로세싱하는 데에는 꽤나 서툴다. 그리고 모든 착시 현상은 이런 서툰 이미지 프로세싱의 결과다.
꽤나 유명한 착시 현상 중 하나인 Müller-Lyer 착시 현상을 살펴 보자. 아래 그림처럼 화살표시(?)가 돼 있는 선 두개를 놓고 보면, 이 둘은 같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위에 있는 선이 아래의 선보다 짧아 보인다. 이게 도대체 움직이는 환경을 관찰하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

위의 그림을 조금 바꿔보자. 아래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어떤 건물의 귀퉁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우리가 실제로 이런 건물 앞에 서 있다고 한다면, 왼쪽의 회색 선은 건물 전체 높이의 일부분에 해당하고, 오른쪽의 회색선은 건물 전체 높이와 일치한다고 판단할 것이고, 따라서 오른쪽의 회색선이 왼쪽의 회색선보다 길다고 생각한다면 그 판단은 정확하다. 결국 우리 뇌는 시각적으로 길이가 같을 때 이를 같다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길이가 같은 두 선의 길이를 같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다. 이는 우리가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을 인식할 때,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정확성이 아닌 그 시각적 정보가 상징하는 대상의 물리적 정확성을 예측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물리적 정확성은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체의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이 정확할 때에만 유효하다. 즉, 물리적으로 동일한 길이를 놓고 보더라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길어보이고, 멀어질수록 더 짧아진다는 예측을 미리 하고, 시각적으로 전해지는 정보가 그 예측에 정확히 일치하는 걸 확인함으로써 어떤 물체의 물리적 길이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이제 약간 다른 종류의 착시 현상을 살펴보자. 아래 그림의 정중앙의 점을 보면서 머리를 화면을 향해 앞으로 움직여보라.

이미지 출처 : <The Vision Revolution> by Mark Changizi
주변의 부옇게 된 타원체들이 실제보다 더 빨리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는 환경이 주는 시각적 정보를 해석하는 뇌가 일으키는 착각이다. 더 자세한 게 궁금한 분들은 앞서 언급한 <The Vision Revolution>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아무튼 핵심은 인간의 시각은 움직임을 통해서 주변을 감지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착시는 정지된 이미지에 대한 뇌의 착각의 결과이다.
작년 여름에 "스트레스 레벨을 확인시켜주는 그림"이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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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애니메이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스물스물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착시 현상의 하나로, 앞서서 봤던 머리를 움직이면 부연 타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눈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의 눈은 원래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림 여기저기를 계속 스캔한다. 그리고 그런 눈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위의 그림 중 어느 한부분에 집중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물결치는 현상이 느려지거나 멈추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림이 물결치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보다 효율적인 시각 정보 처리를 위해) 사람 눈동자가 정지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이 그림이 물결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신경외과나 안과를 찾아가 볼 것을 진지하게 권한다. 스트레스 레벨에 따라 사람 눈동자의 움직임이 심해진다는 생리학적 현상이 밝혀지지 않는 한 (아직까지 이런 사실이 보고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겠다.
@ 관련글 : 그럴 리가 없어!
@@ 작년 8월에 스트레스 그림이 한창 떠돌 때 써야지 생각했는데 거의 10달에 걸쳐서 쓴 글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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