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어느 정도는)
으아, 제목 한번 선정적이다. ㅡㅠㅡ 벤포드의 법칙이 어쩌고 지수 함수가 저쩌고, 비율이 이러쿵 17대1이 저러쿵하고 다 떠든 것도 결국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멍석 깔기. 자, 그럼 무슨 이야길 하려던 건지 풀어헤쳐 볼까나~.
사람은 자신의 타액은 아무런 맛이 없다고 느끼고, 자신의 콧속을 비롯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잘 못 맡고, 37도에 달하는 자신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렇듯 자신의 일반적인 몸상태를 기준점으로 맞추게 되면, 이 기준점에서 벗어나는 아주 작은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체온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의 체온은 보통 37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보다 1-2도 정도 온도가 높아지면 몸에 열이 난다고 이야기하고, 몸에 열이 있는 사람의 이마를 짚어보면 뜨겁다(따뜻하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아니면 목욕탕에서 40도 정도의 물을 열탕으로 분류하여 이 정도면 꽤 뜨겁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2-3도 정도의 온도 차이를 사실 온도의 관점에서 보면 별게 아니다. 우리는 보통 섭씨로 온도를 표현하지만, 어떤 물질이나 물체의 온도를 나타내는 절대적 단위는 따로 있어서 섭씨 온도에 약 273도를 더해주어야 한다. (이 절대온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자.)
즉, 사람 체온은 섭씨로는 37도지만 절대 온도로는 310도에 달한다. 310도를 기준으로 2-3도의 변화는 1%가 채 안 된다. 절대 온도의 관점에서 몸에 약간의 열이 있는 걸 감지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체온을 기준점인 0으로 삼는다면 2-3도의 변화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낄 수 있다.
이게 단순한 추측이 아닌 것이 실제로 사람은 37도와 39도의 차이는 비록 2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40도와 43도 사이의 3도 차이보다 크게 느낀다. 극단적으로는 물 온도가 80-90도쯤 된다면 사실 몇도 차이가 나든 다 똑같이 뜨거울 뿐 그 "상대적"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타액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맛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다른 음식의 맛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고, 평상시에 자신의 콧속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고 인식할 경우, 주변에서 그로부터 아주 작은 변화가 있는 미묘한 냄새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식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작은 변화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기도 한다.
자, 우선 다음 사진 한장을 보자. 이 사진에 사용된(?) 색을 식별할 수 있는대로 전부 나열해보자.

자, 색깔을 다 골라낸 분들은 클릭
진화 신경생물학자인 마크 창기지(Mark Changizi)[footnote]창기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링크를 안 걸면 섭섭하지.[/footnote]의 책 〈The Vision Revolution: How the Latest Research Overturns Everything We Thought We Knew About Human Vision〉[footnote]지금 아마존에서 킨들 버전이 $1.99 밖에 안 한다. 이 가격이라면 킨들이 있는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한다.[/footnote]에서 사용된 테스트(?)인데, 그 책을 통해 창기지는 인간의 시각이 몇가지 특수한 기능에 특화되게끔 진화해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특화된 기능 중 하나가 사람의 사소한 피부톤 변화에 대단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도 대단히 핵심적인 사회적 동물 인간에게 있어서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무서워서 창백해지거나, 어디가 아파서 누렇게 뜨는 일과 같은 작은 변화를 눈치채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혹은 자신과 유사한 피부색의 기본 상태에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액과 콧속은 아무런 맛도 냄새도 없다고 느끼고, 자신의 체온을 뜨겁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흰색을 아무런 색이 없는 상태로 파악한다. 그렇지만 이는 색상에 대한 기계적인(?) 분류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사람의 시각 기관인 눈과 시신경은 실제로 자신 혹은 그와 비슷한 피부색을 기준점인 0으로 맞춤으로써 그로부터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색에 대한 감각 때문에 앞선 사진에서 아무것도 없는 색인 흰색은 눈에 확 들어와도, 아이들의 피부색은 분명히 하나의 고유한 색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레이더망을 피해가는, “눈에 띄지 않는 색”이 된다. 창기지는 이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단어는 거의 모든 언어를 망라하고 잘 없다는 거다.
요새는 특정 색깔을 살색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적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아는데, 실제로 내가 어릴 때 크레파스의 색깔 중에 “살색”이란 색이 있었다. 딱히 사람의 피부색을 닮았냐하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빨간색, 녹색, 검정색 등 색깔 자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살의 색깔”을 별도의 단어로 구분해야 한다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긴 하다. (이런 또 다른 케이스는 오렌지색 정도가 있다.)
창가지는 이렇듯 사람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피부색의 아주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는 보통 사과가 빨갛다고 한다. 그런데 사과 한박스를 사서 뜯어보면 사실 사과의 색깔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다양한 색깔들을 전부 빨간색으로 묶어 버린다.
이렇듯 색깔을 하나로 묶어서 분류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생김을 뜻한다. “사과는 빨갛다”는 식의 말이다. 반면에 사람의 피부색을 어떤 한가지 색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이에 대해 스테레오타입을 갖지 않고, 그 피부색의 미묘한 차이와 변화를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피부색을 인식하게끔 진화한 결과 인종차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수만년간 비슷한 환경 하에서 같이 진화해온 사람들 이외의 피부색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런 다른 피부색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기준점 0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피부톤의 변화는 그만큼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극단적인 일례로 부끄러워서 홍조를 띈 흑인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거다. 그리고 흑인들의 피부색을 “검다”고 묶어버림으로써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이는 흑인들의 경우 다양한 감정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피부색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황인의 피부톤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그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이렇듯 우리와 다른 피부색에 둔감한 것이 어찌보면 진화의 결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인종차별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려는 이야기는 정확히 그 반대다.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무엇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은 우리만큼 다양한 감정 변화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며 그들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다양한 감정 변화가 발현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우리와는 조금 다른 존재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줄 수 있게 되는 거다.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제목이 이쯤 되면 짜증나겠지만 클릭, 파닥파닥 파닥파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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