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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31 16:47 2011/07/3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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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 담긴 과학과 마법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30 03:46 최박사

가디언에 맥주 양조 과정에 대해 잘 정리해 놓은 글이 올라왔길래 소개합니다. 맥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볼만합니다. 원문을 직접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영문 제목을 클릭하세요.

The science and magic of beer

A pint of Greene King ale
수백년간 우리의 제1의 사회적 윤활유. 사진: Graham Turner/Guardian

인간의 땀과 신의 사랑으로 맥주는 태어났다." 성 아놀드

우리는 맥아의 자손이다. "(맥주) 한잔 할래?"라는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사교행위로의 초대이다. 맥주는 우리에게 제1의 사회적 윤활제이고, 지난 수백년간 그래 왔다.

그렇지만 우리 중 와인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맥주를 고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발효된 포도 주스는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되는데 반해, 맥주는 이를 탄생시킨 맥아제조인과 양조업자의 뛰어난 기술에 대해 대수로워하는 일 없이 들이킨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맛과 향에 대해 거의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는다; 우리의 기분과 우리 앞에 놓인 음식에 따라 적절한 맛과 향을 맞출 수 있는데도 말이다.

맥주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손질된 곡물 주스다 : 맥주는 액체 빵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맥주를 처음 만든 이들은 수메르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양조를 위한 별도의 곡물을 재배하여 그들의 신을 찬미하기 위해 맥주를 마셨다. 다양한 문화에서 맥주는 신의 선물로 비춰졌다 (이스트를 칭하는 중세 영어는 godisgoode였다). 맥주는 지역과 문화의 표현이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통 지방 특산품이랄 수 있다.

맥주 양조는 예술과 과학의 조합으로 뛰어난 양조업자는 두가지 모두에 재능을 타고 났다. 양조업자 내면의 예술가는 재료를 고르고 최종 상품의 맛과 향의 균형을 맞춘다. 그 내면의 과학자는 곡물과 물, 홉, 이스트 간의 화학 반응을 이해하고 이를 조심스럽게 원하는 방향으로 지휘한다. 양조 과정이란 대단히 복잡해서 지금 할 이야기는 그 개요에 불과하다.

맥아 만들기

맥주와 와인을 (알콜이 있는) 술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스트가 알콜로 변형시킬 수 있는 식량인 당분이 필요하다. 와인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과일은 동물을 유혹하여 그들이 그 씨앗을 퍼뜨릴 수 있게끔 자체적이고 자연적으로 당분을 축적한다. 그 반면에 맥주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곡물은 그 자체로는 당분이 없다. 대신에 곡물들은 탄수화물이 가득하여, 배아/묘목을 키우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이를 사용한다. 이 탄수화물을 이스트가 사용할 수 있는 당분으로 바꾸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곡물에서 당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은 양조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이는 동시에 양조업자로 하여금 맛과 질감을 아주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 이는 와인 양조업자들은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종류의 권한이다.

효소는 – 자신은 화학 반응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화학 반응을 촉진시키는 생물학적 촉매 – 곡물에서 당분을 추출해내는데 쓰인다. 잉카 여성들이 옥수수주인 치치를 만들기 위해 곡물(옥수수)을 씹을 때면, 그들은 타액 안에 있는 아밀라제라는 효소를 사용하여 탄수화물을 분해한다.

영국식 맥주가 유래된 근동지방에서의 고대 양조업자들은 곡물이 발아과정에서 그런 효소를 자체적으로 공급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리가 그런 효소를 특히 잘 만들어낸다는 게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맥주를 만드는데 보리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효소 생산을 유발시켜서 곡물에 축적돼 있는 탄수화물을 당분으로 변환시키기위해, 날 보리를 차가운 물에 며칠간 담가서 발아를 도운 후 건조시킨다.

맥아제조인은 발아된 곡물(맥아)을, 열과 건조함이 배아는 죽이되 양조에 필요한 화학은 보존시키는, 가마에 집어넣음으로써 이 과정을 중단시킨다.

흐릿한 노란색의 가벼운 맥주에 쓰일 맥아를 만들려면, 맥아제조인은 보리를 80도에서 조심스럽게 말려서 "흐릿한 맥아"를 얻는다. 이보다 온도를 더 올리면,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복잡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분의 캬라멜화와 함께 곡물이 갖고 있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 요소인) 아미노산과 당분 사이에서 복잡한 메일라드 반응(Maillard reactions)가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고기 덩어리를 오븐에서 굽거나 빵을 토스트할 때도 이와 같은 "갈색으로 변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온도가 높고 가열을 오래할수록, 맥아의 색은 더 어둡고 진해지고, 맛과 향은 더 풍부해진다.

높은 온도(150-180도)에서는 색, 맛, 향 모두 풍부한 맥아가 얻어진다. 이런 맥아를 묘사하는 단어들은 "캬라멜", "초콜렛", "풍부하다", "검다" 따위가 있다. 이런 맥아로는 포터나 스타우트 같은 상징적인 스타일의 어둡고 묵직한 맥주를 만들 수 있다.

맥아즙 만들기

맥아를 굽고나면 이를 갈아서 엿기름물을 만드는 통인 매시 턴이란 용기에 담는다. 여기에 물을 붓고 이를 가열하여, 맥아에서 당분과 다른 화학성분들을 뽑아내고 효소 활동을 더욱 활발히 유도하게 된다. 이렇게 맥아를 물에 담가둬서 생기는 "맥아즙"은 달고, 갈색을 띄면서, 흙 같은 액체다.

방금 언급한 물과 맥아를 혼합하는 첫단계는 그저 "물을 붓는" 별거없는 과정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The first stage of the mashing process above sounds innocuous "water is added" but it is very important. 플리니(Pliny the Elder)가 기록으로 남겼다시피 :

아, 이럴수가! 악의란 얼마나 놀라운 비상함을 품었단 말인가! 물조차도 중독시키는 방법이 실제로 발견되다니."

맥주를 "지역 특색"을 갖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물이다. 아무리 센 맥주도 85-80%는 물이고, 자연히 – 지역 환경과 지질의 산물인 – 물맛은 맥주맛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초기 양조업자들은 지역 물을 최대한 잘 활용하기 위해 그들의 맥주를 물에 맞추었다. 그래서 황산염이 풍부한 트렌트강변의 버튼에서는 물의 쓴맛이 홉의 사용을 제한시켰기 때문에 영국식 페일 에이리 개발됐다. 체코 양조업자들은 필센의 부드러운 물 때문에 다량의 홉을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남부와 더블린의 알카리성에 탄산염이 풍부한 물은 어두운 맥아의 산도를 중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어둡고 진한 맥주를 만드는데 유리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어떤 양조업자들은 물의 화학성분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맛을 조절하기 위해 첨가제를 이용하기도 하다보니, 그런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맥주의 "지역성"은 사라졌다.

맛과 향 첨가

이 단계에서 맥아즙에 홉을 첨가하고, 이를 아주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는 구리통에서 끓인다.

11세기까지만해도, 사람들은 홉이 없는 맥주를 마셨다. 현대적 미각 기준에서는 이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일 거다. 홉이 없는 맥주는 잘돼도 꽤나 역겨울 정도로 달고, 심하면 원치 않는 박테리아들이 자라서 눈물이 날 정도로 시게 변해버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조업자들은 향과 쓴맛을 더하고 박테리아가 자라는 걸 막을 수 있는 (아니면 박테리아가 자란 걸 숨길 수 있는) 식물과 허브 아니면 향신료 등을 첨가했다. 이런 첨가제로 메도우스위트, 로즈마리, 들버드나무 등이 사용됐다.

불행히도, 일단 이런 식물들을 재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8세기경부터는 중부유럽에서 홉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홉은 1520년에 와서는 켄트에서도 자라는 등, 비교적 재배하기 쉬웠고 쓴맛과 향을 더하기에 이상적이었다. 게다가 홉은 살균 효과도 뛰어났다.

홉은 대마과의 일종이다. 홉의 꽃과 열매는 알파산, 베타산, 탄닌과 기름을 함유하고 있다. 이들의 비율은 홉의 종류에 따라 다른데, 알파산은 맥주에 쓴맛을 더하고, 기름은 향을 더한다. 열매의 베타산과 탄닌은 맥주가 안정화되게 돕는데다가 아주 중요한 살균 성분이 있다.

홉은 맥아즙을 끓이는 도중이나 후에 첨가한다. 홉을 빨리 첨가할수록 쓴맛이 강해지고, 늦게 첨가하게 되면 아주 중요한 기름이 채 증발하지 않기 때문에 맥주에 남아서 향을 더해준다. 적당히 홉을 첨가한 맥주는 꽃(floral)이나 송진(resiny), 또는 감귤류의 과일(citrusy)의 기운이 강하게 감돈다.

이를 다 끓였다는 건, 양조업자가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고, 당분이 없는 보리 곡물을 풍부하고, 쌉쌀달콤한 – 솔직히 말하면 마셔보면 상당히 구역질 나는 – 액체로 바꿔놓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습지물 같은 액체를 완벽한 한잔의 맥주(pint)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이스트 세포들이 출동할 차례다.

발효

맥아즙이 식은 후 공기를 통해주고 나서, 이스트를 첨가하면 발효가 시작된다.

발효 과정은 보통 크게 두단계로 나뉜다. 일단계의 초반에는 산소가 충분히 많아서 이스트 세포들이 쉽게 증식한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는 알콜은 생겨나지 않는다. 산소를 소모함에 따라서 이스트 세포의 증식 속도가 둔화되지만, 당분이 에탄올과 이산화탄소로 바뀌는 발효가 시작된다.

발효란 이스트가 당분을 알콜(에탄올)과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알콜 외에도 이스트는 에스테르, 퓨젤 알콜, 케톤, 페놀, 그리고 지방산과 같이 맛과 향을 내는 다양한 화합물들을 만들어낸다. 맥주에서 과일맛이 나게 하는 화합물이 에스테르고, 페놀은 맵거나 훈제한 듯한 맛과 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양조업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기 위해 각별히 골라내서 조심스럽게 조절한 이스트 품종을 사용한다.

이스트의 균류로서의 특성을 이해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전통과 미신에 의존했다. 바이킹족들은 "양조 지팡이"가 있어서 이걸로 맥아즙을 저어주면 맥아즙이 마법처럼 맥주로 바뀐다고 믿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는 이 지팡이는 휴면기의 이스트로 뒤덮여 있었을 거고, 맥아즙을 이 지팡이로 저어주면 맥주에 공기가 들어가고 이스트가 옮겨갔을 거란 걸 알 수 있다. 이런 양조 지팡이는 가보로 전해졌는데 – 이스트 감염을 대대손손 물려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스트를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기까지는 루이 파스테르 같은 과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양조를 위한 이스트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스타일이 있다 : 에일(ale)과 라거(lager). 에일 이스트(Saccharomyces cerevisiae – "당분 균류 에일")는 비교적 따뜻한 온도(15-25도)에서 사용하고, 맥아즙 표면에 거품을 잔뜩 만든다. 이런 종류의 이스트는 라거 이스트만큼 당분을 알콜로 많이 바꾸지는 않기 때문에, 약간의 단맛을 남긴다. 또 맛과 향에 과일향을 듬뿍 나게 하는 것도 에일 이스트다.

라거 이스트는 그 최초의 순수 배양균이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맥주 공장에서 분리됐기 때문에 S. carlsbergensis로 불리운다. 라거의 양조는 바바리아 지방의 양조업자들이 길고 무더운 여름에도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상태로 보존하고자, 맥주를 깊고 서늘한 동굴에 보관–독일어로는 lager–하면서 중부 유럽에서 15세기에 시작됐다. 이때 낮은 온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면서 또한 더 많은 당분을 알콜로 바꿔 더 드라이한 맥주를 만들 수 있는 라거 이스트가 진화했다.

숙성

발효의 첫단계에서 이스트 세포들은 쉽게 발효시킬 수 있는 당분의 대부분을 소모한다. 그러고나면 발효의 2단계가 시작된다. 발효는 더뎌지고 이스트는 말토트리오스 같은 더 크고 무거운 당분을 놓고 작업을 한ㄴ다. 이를 보통 숙성한다고 말한다.

숙성은 맥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환경에서 진행될 수 있다. 영국의 전통적인 맥주 스타일인 정통에일은 술통(캐스트, cask)에 그저 "들어부으면" 된다. 이렇게 "캐스크에서 숙성시키는" 맥주는 양조장을 떠날 때 미완의 상태다. 최종 숙성 단계는 펍의 저장소에서 캐스크 안의 이스트가 남아 있는 당분을 알콜로 바꾸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맥주가 숙성됨에 따라 술이 조금 더 세질 뿐만 아니라 더 부드러우면서 과일 같은 맛도 생겨난다. 숙성은 보통 2주부터 4주 정도까지 걸리지만 맥주의 종류에 따라서는 간혹 더 오래 걸리기도 한다.

라거는 보통 양조장의 커다란 탱크에서 거의 어는점 가까이에서 (바바리아 지방의 동굴에서와 비슷하게) 숙성시킨다. 맥주의 종류에 따라 1달에서 6달까지 걸린다. 저온 숙성은 이스트에서 나오는 황화합물을 줄이는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맥주를 맑게 하고, 과일향의 에스테르를 줄여 더 깔끔한 맛이 나는 최종 상품을 만들어낸다.

라거는 대게 출하 전에 저온 살균 과정을 거친다. 이는 캐스크에서 숙성된 에일과는 달리, 라거(와 크림 플로우 에일)는 펍에 도착하는 시점에서 생물학적으로는 죽어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시기

내게 있어서 맥주는 따로 맥주만 마시라고 있는 술이 아니다. 맥주와 음식은 식탁 위에서 아주 궁합이 잘 자는다. 나는 감귤류의 시트러스/자몽향이 있는 쌉쌀한 인도 페일 에일이나 쌉쌀한 라거는 커리와 같이 먹는 걸 좋아한다; 아니면 잘 익힌 진한 맥아의 스타우트는 진한 초콜렛 디저트를 보완하는데 딱 좋다.

맥주를 마실 때면 언제든 잠시 멈춰서 그 맥주를 음미하라. 잔을 들고는 당분도 없고, 향도 없고, 바싹 마른 곡물을 우리 눈앞에 있는 경이롭고 다면적인 액체로 탈바꿈시킨 이들의 노고와 업적에 경의를 표하라. 아주 깊이 있게 마시고 즐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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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30 03:46 2011/07/30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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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기분이 말도 못하게 꼬릿꼬릿한데, 블로그 독자님들은 요새 어떠신가 모르겠네요. 기분이 꼬릿꼬릿한 날엔 만화라도 보고 웃어야지요. 그래서 제가 즐겨보는 너드들을 위한 미국(+캐나다) 웹툰(?) 몇개만 소개해볼까 합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래도... 순서는 공평하게 작가 이름 ABC순.

  1. Adam ScottDilbert Daily Strip : 이거야 뭐,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고전. 직장툰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너드들이 엔지니어 Dilbert의 비애와 애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가 이해하겠는가? ㅋ (Google reader 구독자수 : 10만+, 업데이트 주기 :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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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plosm.net 4인방Cyanide and Happiness : 너디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 만화는 상당히 어둡고, 시니컬한데다가 간혹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내용도 있고, 간혹, 아니 꽤나 자주 폭력적(?)인 장면들도 올라오는 관계로 취향을 조금 탈 수 있지만, 이런☟ 보석은 누가 봐도 걸작. (Google reader 구독자수 : 7만+, 업데이트 주기 :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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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Jorge ChamPhD Comics : 스탠포드 대학의 교내 신문에 연재를 시작했다가 이제는 이 바닥에서는 모르면 간첩인, 대학원생의 애환을 담은 본격 대학원 만화. (Google reader 구독자수 : 7만+, 업데이트 주기 : 최근에 매우 뜸해져서 주1회가 채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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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andall Munroexkcd : 이바닥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덕후계 최강의 만화. 이미지 소스에 걸어놓은 title도 반드시 같이 읽을 것. (Google reader 구독자수 : 4만+, 업데이트 주기 : 매주 월,수,금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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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anach-Tarski theorem was actually first developed by King Solomon, but his gruesome attempts to apply it set back set theory for centuries.


  5. Ryan NorthDinosaur Comics : 아래의 템플렛 한가지만 이용하여 대사만 바꿔서 올리는 특이한 포맷의 만화. 근자감 넘치는 골 때리는 캐릭터 T-Rex의 조금은 덜떨어진 주절거림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지만 대사가 너무 많아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Google reader 구독자수 : 46만+, 업데이트 주기 : 매주 월-금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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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Zach WeinerSaturday Morning Breakfast Cereal : 주로 과학과 철학, 섹스, 이 세가지 주제를 다루는 아주 아주 훌륭한 작품. 자체 극단에서 정기적으로 제작하여 올리는 동영상도 재밌다. (Google reader 구독자수 : 6만+, 업데이트 주기 :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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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추천도 받습니다. :-)


미처 몰랐던 만화를 발견하셨다면 클릭

2011/07/29 19:32 2011/07/2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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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1. 7. 29. 15:18) 어제 글 써놓고도 52년간 6번 기록 경신되는 게 정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지가 계속 찝찝하더라고요. 글에서는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싶어서, 6회와 4.54회의 차이가 평균적으로 150년이 넘는 차이라고 말하고 어물쩡 넘어갔는데, 평균은 평균이고, 사실 통계에서는 평균만큼이나 편차가 중요한 거라... 평균만 말하는 사람들 중엔 거짓말쟁이들이 많습니다. ㅡㅠㅡ

아무리 취미생활 블로깅이라지만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블로그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실제로 이 정도 차이가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지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제일 속편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랜덤 넘버 200개(=200년간 기상 관측한 가상의 기록)짜리 100세트를 생성해서 각 세트에 대해 최대값 기록 경신 빈도를 세봤습니다. 그 결과 52년 동안 기록 경신 6회와 4.54회는 통계적으로 의미 없다고 판명났습니다.

초반 5년에서 10년 사이에 나타나는 기록 경신 빈도의 편차가 너무 심해서 그 이후의 데이터는 결국 다 같이 씻겨 내려갑니다. -_-a (무슨 얘기냐면 기록 경신 횟수란 건 누적되는 수치라 처음 10년 사이에 4-5번 기록 경신이 돼버리면 그 이후에는 기록 경신이 아무리 더뎌도 결국 처음 10년의 4-5번을 다 안고 간다는 이야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래 그림의 파란색 선들이 100쌍의 랜덤 데이터들입니다. 실제 기상청 관측 데이터가 파란색 그래프들에 파묻혀 있죠? 강수량이 완전 랜덤하게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기상청 관측 데이터(빨간 동그라미)와 기댓값 계산 결과(하얀 동그라미) 차이 정도는 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으로, 이것만 갖고는 "이상 기후"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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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공들여 쓴 글, ㅡㅠㅡ 지우긴 왠지 아깝고, 한가한 양반의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되는 취미생활 정도로 남겨두겠습니다. -_-,, 한가하신 분들은 이 하릴없는 양반이 무슨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허송하고 사나 구경이라도 하시라고... 멍청~. 그렇지만 글의 전반적인 메세지는 여전히 유효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런 아마추어적인 통계 분석 말고, 진짜 꼼꼼한 통계 분석에 기반해서 기후 변화 추이를 살펴봐야하겠지요.

more..

2011/07/29 15:17 2011/07/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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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100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물난리가 났다. 서울 시내에서 두자리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등 최근 10년새 서울의 심장으로 떠오른 강남이 초토화됐다. 이런 사태를 대비하지 못한 서울시와 이를 예측하지 못한 기상청의 무능에도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 사고(?)는 대단히 안타깝지만 사실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규모의 사태에 대비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기예보는 대기의 움직임에 대한 물리학적 이론에 기반한 미래의 예측으로 종종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일기예보는 과거의 통계적 기록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이다. 과거에 이런 형태의 기압골과 구름이 형성돼 있을 때, 다음날, 혹은 그 다음 며칠 동안 주로 어떤 날씨가 나타나더라는 기록에 비추어보면 내일은, 모레는 이런 날씨가 되겠구나라고 예측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100년에 한번 정도 나타나는 드문 기상 이변을 예측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이런 종류의 기상 이변을 기본적으로 예측하기 불가능하다면, 사실 이에 대해 대비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일이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인재로 돌리기 쉽지만, 일이 터지기 전에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물난리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비책을 세우는 단계에서는 도대체 언제 어느 시점에서 얼마만큼의 자원을 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두손 두발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말 이번 사태가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혹시 이런 사태가 조만간 일어날 수도 있다는 징후가 있었는데 놓친 것은 없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작년 9월에 서울시내에서 이미 한차례 대규모 물난리가 났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작년에 폭우가 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에 대비를 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뒷북 편향(hind-sight bias)다. 작년에 폭우가 온 것과 올해 폭우가 온 것이 독립적인 랜덤 사건이라면, 몇십년,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 2년 연속으로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는 게 오히려 조금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뒷북 편향에 기대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일에서 모종의 도덕적 우월감 따위를 느끼긴 쉽지만, 이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에 대처하는데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더더욱 웃기는 건 뉴스와 신문을 보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와 관련해서 아열대 수증기랑 기류 흐름 따위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분석들은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날지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안 되기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분석들이다.

우리가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어제 내린 이 폭우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랜덤한 사건인지, 최근 몇몇 사람들이 우려하는대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우리나라 기후가 전반적으로 아열대성 기후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인가를 구분해내는 것이다. 이를 보다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통계적으로 엄밀한 방법을 활용해야 겠지만, 연도별 강우 기록만 있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우선 만약 한번 비가 올 때 내리는 비의 양이 랜덤하게 결정된다고 하면 이런 “기록적인” 폭우가 얼마나 자주 내릴지 계산을 해보고, 실제로 기록적 강우가 발생한 빈도를 이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우선 어느 시점에선가 기상 관측을 시작한다고 하면, 그 첫해에는 당연히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 있을 거다. 따라서 첫해에 사상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할 확률은 1이다.

둘째해에는 어떨까? 매번 비가 내릴 때마다 강우량이 랜덤하게 결정된다면 둘째해에 첫해의 기록보다 많은 비가 내릴 확률이 1/2, 첫해의 기록보다 적은 비가 내릴 확률이 1/2이다. 따라서 처음 두해 동안 기록적 강우가 발생할 횟수의 기대값은 1 + 1/2 = 1.5가 된다.

셋째해에 처음 두해 중 한번의 기록을 넘어설 확률은 1/3이 되고, 처음 세해 동안 기록적인 강우 횟수에 대한 기대값은 1 + 1/2 + 1/3 = 1.83회다. 넷째해에는 여기에 1/4을 더해주면 2.08회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햇수가 더해갈수록 계속해서 확장하면 1 + 1/2 + 1/3 + 1/4 + 1/5 + … 1/n을 계산함으로써 기상 관측 이래 n년 동안 사상 초유의 폭우 기록이 몇번이나 경신될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00년간 기록을 살필 경우 n=100을 대입하면 5.19가 된다. 즉, 100년 동안 5번 정도 기록이 경신(?)될 거란 이야기다. 200년의 기록을 살필 경우 5.88회로, 처음 100년과 그 다음 100년을 비교할 경우 처음 100년간은 강우 기록이 5번이 넘게 경신되는 반면에, 그 다음 100년간 처음 백년의 최다 강우량 기록을 경신하는 일은 5.88 − 5.19 = 0.69로 1번이 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처음 기상 관측 이래의 최대 강수량 기록이 몇번이나 경신되느냐에 대한 정보로, 최근에 이런 종류의 폭우가 특별히 자주 발생하는가를 가늠하는데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 기상 관측 역사는 1904년에 시작되어 이제 100년을 간신히 넘기는 시점에서 이런 종류의 계산은 데이터 포인트를 달랑 하나 던져줄 뿐이다. 그렇지만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이 100년의 기록을 활용해보자.

1904년부터 1933년까지의 30년간의 강우 기록을 우선 살펴 본다. 30년 동안 최대 강우량 기록이 경신될 횟수에 대한 기댓값은 3.99회다. 즉, 30년간 대략 4번 정도 강우 기록이 경신될 것이다. 물론 통계적 변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보다 적거나 많은 것이 가능하다. 아무튼 이 기록, 예를 들어 1904-1933년 사이에 강우량 기록이 5번 경신됐다고 하면 이를 1번 데이타라고 하고 1번 : 5회라고 기록하자.

이제 1905년부터 1934년까지의 30년간 기록을 다시 살펴보고, 이 사이에 강우량 기록 경신이 몇번 생겼는지를 2번 : X회로 기록한다. 같은 방법으로 1906년부터 1935년의 30년간의 기록을 3번 데이터, 1907-1936년의 기록을 4번 데이터로 차례로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1982-2011년까지 반복하면 30년 단위의 데이터가 1번부터 79번까지 총 79개 생긴다. 그러면 이제 이 79개의 데이터를 데이터 번호는 x축에, 30년 단위로 끊었을 때 최대 강수량 기록이 경신된 횟수는 y축에 그래프를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그래프의 경향성을 살펴보는 거다.[footnote]끊어서 살펴보는 기간을 30년 대신에 40년이나 50년 단위로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50년 단위로 끊어서 살펴볼 경우 강수량 기록 경신 횟수의 기댓값은 4.50이 되는데 실제 데이터의 편차는 4.50을 중심으로 더 작을 거다. 대신 총 데이터 갯수가 79개에서 59개로 줄어드는 trade-off가 있다.[/footnote]

79개의 데이터가 3.99회를 기준으로 약간의 변동이 있더라도, 일정한 경향성을 갖고 증가하거나 감소하지는 않는다면, 최근의 기록적인 강우는 랜덤한 사건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런 59개의 데이터가 일정하게 증가를 한다거나, 어느 시점까지는 증가하지 않더니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갑자기 많아지는 일이 생긴다면 지구 온난화 따위의 새로운 요인으로 인해 전반적인 기후 변화가 일으킨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사실 이번 일은 대단히 안타깝지만 정말 재수가 없는 케이스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라면 랜덤 사건이 아니라 이런 기록적인 폭우가 갈수록 잦아질 것이란 점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단 점에서 이번 일은 인재로 분류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서울시의 안일함을 질타하는 건 정당한 일이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이 대단히 시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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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매일경제

@ 사실 이 글을 쓰는 김에 데이터를 직접 살펴보고 분석해볼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기상청 홈페이지 어디에서도 연도별 최대 강우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다. orz 혹시 연도별 강우 기록(시간단 강우량 기록이어도 좋고, 하루 최대 강우 기록이어도 좋고, 장마철 강우총량 기록이어도 좋습니다)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시면 제보 좀 부탁드립니다!

@@ 갑자기 무릎까지 물이 잠기기 시작한다고 신발 벗어들고 걷는 분들 있는데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흙탕물 밑에 뭐가 있는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자칫 유리나 돌, 나뭇가지 같은 거 잘못 밟아서 발이 찢어지거나 하면 감염 위험이 굉자이 높습니다. 폭우에 휩쓸려 내려오는 흙탕물은 세균이 엄청나게 드글거립니다. 젖은 발로 신발 신고 다니는 게 많이 찝찝하거나, 비싼 신발이 조금 아깝더라도 신발은 신은 채로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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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7 23:37 2011/07/2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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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 유전자와 언론

작년 7월 미국의 보스턴 대학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진이 장수와 관련한 유전적 신호를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가 Science지에 실린 일이 있다. 그리고 당시에 메이저 언론부터 찌라시까지 국내의 많은 언론사들이 이를 열심히 보도하였다. “장수 유전자”라는 검색어로 검색하여 당시의 연구 결과에 대해서만 대충 추려본 게 이정도다.

이 외에도 “장수 유전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매년 한두건씩 나오고 있는 터라 이와 관련한 기사들은 차고 넘친다. 아무튼 Science에 실렸던 바로 이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이미 그 실험 방법과 관련하여 말이 많았는데, 결국 1년을 갓 넘긴 지난주에 이 논문을 발표했던 연구진이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 논문을 철회했다. 그런데 이 논문이 철회됐다는 사실을 보도한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이 연구 결과 하나가 잘못됐다고 해서 “장수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건 아니다. ‘장수 유전자 있다더니 알고 보니 없더라! 거짓말쟁이들 같으니라고’ 같은 캐취하고 센세이셔널한 헤드라인을 뽑을 수 없는 고충은 인정한다. ‘장수 유전자 발견했다는 연구 중 이것 하나는 철회’ 이렇게 헤드라인을 뽑을 순 없는 일 아닌… 뽑을 수 없어도 뽑는 게 언론의 사명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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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지식의 보고 wikipedia

§ 모든 새로운 사실이 뉴스는 아니다

아무튼 장수 유전자는 존재할 거다. 나라도 장수 유전자가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 중 한군데에 돈을 걸어야 한다면 당연히 존재한다에 건다. 그게 장수가 됐던 뭐가 됐던, 그리고 그 유전자가 있는 사람이 반드시 그런 형질을 발현하느냐와는 또 별개로, 모든 생물학적 정보와 관련된 유전자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거니까. 이 말 많은 연구 결과 외에도 장수 유전자나 단명 유전자와 관련한 연구는 꽤나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건 결코 할 일 없는 양반들이 헛짓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게 왜 뉴스거리가 되는가이다. 우리가 100%의 확신을 갖고 있는 미래의 사건은 그게 현실화가 되더라도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2010년 7월 12일 새벽으로 가보자. 그날 새벽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맞붙었다. 어떤 사람들은 밤잠 설쳐가며 경기를 봤을 거고, 어떤 사람은 그날 아침에서야 신문과 뉴스를 통해 결과를 확인했을 거다.

그런데 아침이 돼서 신문을 딱 펼쳤는데, 헤드라인이 “2010 월드컵 우승국 결정!”이고 기사 내용이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팀이 우승했다”가 전부라고 해보자. 이 기사의 내용은 그날 새벽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알려준 것도 사실이고, 기사 내용에 거짓도 없다. 그렇지만 이걸 기사라고 내보내는 언론사는 없다. 이건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팀간 승리한 팀이 우승할 것이라는 것은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도 (천재지변이나 테러 따위로 결승전이 취소되거나 하는 아주 작은 확률을 제외하고) 거의 100%의 확률로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장수 유전자가 존재할 거란 사실에 대해 100%의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런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것 자체는 뉴스 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서 이런 연구 결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연구 결과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월드컵의 우승국가가 결정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우승국가가 어디인가와 같은—그 장수 유전자가 정확히 어디에 숨어있던 어떤 유전자인가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앞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장수 유전자와 관련한 뉴스 기사의 보도는 어떨까? 이런 뉴스에는 그런 종류의 디테일들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과학자들이 장수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월드컵 우승팀이 나왔다”는 것에 불과한 정보가 뉴스 기사감이 되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장수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말에 “장수의 비결을 발견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장수의 시대가 곧 도래할 거다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 속도와 성과에 대한 과도한 맹신을 사람들에게 떠먹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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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언론들이 사람들에게 황우석이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해 당장이라도 다양한 난치병 치료법을 줄줄이 개발해서 몇백억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뉴스 기사만 보면 내일 병원에 가면 어제는 없던 암 치료제가 나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서 새로운 암 진단 및 치료법이 매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장수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진시황제가 꿈꾸던 불로장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실과 다르다. 이 모든 건 인간의 생로병사의 과정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퍼즐 조각 하나 하나들을 찾고 있는 과정이다. 퍼즐을 맞추는 과정도 아니라, 장롱 밑으로, 소파 틈새로 들어가 있는 퍼즐 조각들이 어디 있나 찾고 있는 과정이다.

§ 로버트 에팅저의 인체 냉동 보존술

엊그제 인체 냉동 보존술의 창시자 로버트 에팅저(Robert Ettinger)가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지 않았다. -_-a 적어도 로버트 에팅저의 머릿속 세상에서는 그는 죽어도 죽지 않는 남자니까… 인체 냉동 보존술이란 게 뭐냐면, 상상하는 바대로다. 인체를 영하 196도의 온도에 냉동 보관하는 거다. 그리고 먼 훗날 인간이 생로병사에 대한 신비를 모두 파헤치게 되는 시점이 오면, 그때 해동을 하여 소생시킴으로서 영생이나 그에 가까운 것을 얻겠다는 발상이다. 딱 들어도 공상과학 같다고? 공상과학 맞다. 물론 영구기관을 만들겠다거나 하는 완전히 정신 나간 부류와는 구분되어야겠지만, 인체 냉동 보존술은 아직까지는 공상과학이다.

그 기본적인 개념은 이렇다. 현재로서는 법적으로 산 사람을 냉동시키는 것은 금지돼 있는 관계로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만을 냉동시킬 수 있다. 여기서 법적으로 사망했다함은 심장은 멈췄으나, 다른 기본적인 신체의 생물학적 메카니즘, 특히 뇌의 활동은 완전히 정지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심장이 멈추더라도 인공적으로 뇌에 피(와 산소)를 공급한다. 그리고 나면 몸은 얼음물에 담근 상태로 냉동 시설로 옮겨지는데 이때 피가 응혈되는 걸 막기 위해 항응혈제인 헤퍼린(heparin)을 투여한다.

냉동 시설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인체의 냉동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체내의 수분을 뽑아내는 거다. 물은 얼면 부피가 늘어나는 아주 기이한 물질이라, 인체를 그냥 얼리면 유리병에 물을 넣고 이걸 얼리면 물병이 깨즈듯이, 세포내의 물이 얼면서 세포벽을 다 찢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얼릴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 몸을 물기를 바짝 말려 건포도처럼 만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_-,, 체내의 물을 글리세롤을 주성분으로 하는 냉동 보호제(cryoprotectant)로 바꿔준다. 글리세롤의 특징 중 하나는 어는(freezing) 대신에 유리화(vitrification)라는 과정이 일어나는데 이는 아주 아주 단단한 액체 상태가 되는 거라고 보면 되겠다. 그 후에 나서 영하 130도 정도의 드라이 아이스로 일차 냉동을 하고, 그 후에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로 냉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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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고, 일부 장기들은 이런식으로 냉동 후 재해동하여 이식하는 일 따위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게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장기 단위가 아니라 (고등) 생명체 단위에서 냉동-해동-소생을 실천한 케이스는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고, 아직은 모르는 먼 미래의 기술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실제로 별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에팅저는 물론이고 그의 사별한 두 전부인을 비롯해, 미국 야구 선수계의 전설 중 하나이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등 100여명이 현재 이런 식으로 냉동 보관돼 있다. 이들이 희망하는 것은 몇십년이든 몇백년이든 후에 지금보다 의학과 과학이 훨씬 발전하면, 이 몸을 다 해동시킨 후 소생시키는 거다. (사실 테드 윌리엄스 본인은 화장되길 원했으나 그의 자식들이 “테드 윌리엄스는 평소에도 과학을 신뢰했다”며 얼려 버렸다. -_-,,)

§ 나의 과학은 이렇지 않아!

원래 우리는 우리가 현재 무얼 모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술로 반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이들이 갖고 있던 지병을 고치는 것도, 영생에 가까운 삶을 얻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아니면 인체 냉동을 통해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더라도, 지금 사람을 냉동시킨 방식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 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는 우리가 무얼 모르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 상상으로는 가능해야 할 것 같은 이 기술이 철저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

영하 196도는 매우 낮은 온도다. 이 정도 온도에서 세포 단위에서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수년, 끽해야 수십년 단위에서의 이야기다. 영하 196도라고 하더라도 절대온도로는 77도로 열적변동(thermal fluctuation)이 완전히 얼어붙는(quench되는) 온도는 아니다.

만약 필요한 기술이 개발되기까지 수백년에서 수천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원자나 분자 단위에서의 입자 교환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살아 있는 몸에서는 열적 변동으로 인한 DNA나 세포 손상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복구해주는 메커니즘이 있지만, 몸이 얼어붙어 있는 상태에서 이런 형태의 랜덤한 DNA 손상이 발생, 누적될 경우 이걸 전부 복구시키기란 불가능할 수 있다. 나노테크놀러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무엇이 어떻게 고장났는지 알 경우에 해당하는 거고 랜덤한 열적 변동으로 인한 손상을 추적해 복구한다는 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를 “물리학자”의 냉동인간 이야기라고 포장한다. 이것도, 장수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기사는 앞다투어 보도하는 것도, 그리고 그 연구 결과가 잘못됐더라는 이야기는 정작 보도하지 않는 것도 모두 영생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에 불을 붙여, 과학공상을 과학으로 만들어 신문을 파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자기 몸뚱이를 자기 돈을 들여 얼리겠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 않느냐? 과학공상을 조금 믿는다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과학 발전에 과학공상이 기여한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공상이 과학 발전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공감을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몽상(pipe dream)을 쫓는 일이 아무런 피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체 냉동 보존술과 관련된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소개한 This American LifeMistakes Were Made 에피소드를 꼭 들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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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만에 시그니처 부활시켰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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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 친구 아들의 나이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26 10:19 최박사

수정 (2011. 7. 26. 11:39) : 문제 푸는 분들이 이상한(?) 힌트에 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를 약간 수정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퀴즈입니다, 너무 사실성이나 현실성에 집중하지 말아주세요. 논리적으로 도달 가능한 결론이 있습니다. ㅠㅠ

수정 2 (2011. 7. 26. 18:19) : 여전히 문제 풀이에 방해(? 도움인가?)가 되는 단서가 있어서 또 조금 수정했습니다, ㅋ. ㅈㅅㅈㅅ.

오늘은 새글 대신에 퀴즈나 하나.

오랜 친구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 아니,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지?

= 그냥저냥 사는 거지, 뭐. ㅎㅎ 너는?

− 나도 뭐 그냥저냥. 가족들은? 애가 셋이었던가?

= 응, 남자애 셋이었지, 애들이랑 마누라도 잘 있어.

− 그래, 근데 애들 나이들이 이제 어떻게 되지?

= 애들 나이의 곱이 36이라네.

− 음, 그것만으로는 모르겠는 걸.

= 애들 나이의 합이, 아, 그래 마침 저기 지나가는 버스 번호랑 같구만.

− 흠...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걸.

= 제일 큰 녀석이 요새 축구에 푹 빠졌는데, 이 녀석이 축구에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고.

− 아하, 그렇다면 이제 알겠구만.

문제 나갑니다 : 두번째 남자의 세 아이의 나이는 각각 몇살일까?

@ 퀴즈의 정답을 아시는 분은 비밀댓글로 답을 남겨 주시면, 추첨을 통하여 세분을 선정하여 (제 마음속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쿨럭. 이래도 아무도 댓글 안 달겠지? -_-,, 댓글이 별로 안 달리면, 제 블로그 독자들은 다 바보 멍충이 말미잘 해삼 멍게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댓글을 좀 달까? -_-a

@@ 퀴즈 정답은 봐가면서 적당한 시점에 밝히겠습니다.


답을 아시는 분은 클릭

2011/07/26 10:19 2011/07/2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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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내게서 적어도 이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을 구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것과 실질적으로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높은 교육열”이 항상 조금은 불편하다. 학교 정규수업, 보충수업, 야자, 학원의 무한 뺑뺑이를 통해 아이들이 무얼 배우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제시할 자료들은 대한민국의 실정에는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쓰려는 이 글은 어떤 결론을 내리고,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함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다만 우리가 남의 이야기에 혹해서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기에 문제 제기를 해보고 싶은 것뿐이다.

우선 얼핏 봤을 때 섬뜩한 그래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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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래프는 부모의 소득 수준과 미국의 대학 입시 시험인 SAT 점수의 상관관계를 보여준 그래프이다. 확실히 돈 많은 집 아이들이 성적도 좋다. 돈 많은 집 아이들이 질 좋은 사교육을 받아 더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사교육에 투자하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의 무한 루프… 부의 대물림, 부익부 빈익빈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세상사는 우리 생각보다 항상 조금 더 복잡하고,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경제학자 그레그 맨큐(Greg Mankiw)는 이 그래프를 보면서 집에 있는 화장실 갯수와 SAT 점수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화장실 갯수가 많은 집 아이들의 SAT 점수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방을 화장실로 개조하여 집 안의 화장실 갯수를 늘림으로써 아이의 성적을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아주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소득과 아이의 성적간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부의 대물림”, “부익부 빈익빈” 같은 그럴 듯한 설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상관관계가 아니라 정말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아이의 성적이 좋다는 설명이야 말로 Duncan Watts의 책〈Everything Is Obvious: *Once You Know the Answer〉에서 경고하는 상식적 설명의 함정이 아닌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러면 다른 가능한 설명이 뭐가 있냐고? 자, 아래의 그래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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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래프는 스웨덴에서 195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18세 때 IQ 테스트 점수와 그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의 소득과의 관계를 나타낸 거다. 빨간색 그래프는 친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에 대한 것이고 파란 그래프는 입양된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내서 그 관계를 조사한 거다. 이 그래프를 통해 친아버지의 소득이 높기 때문에 아이의 IQ가 높다는 인과관계적 결론을 유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여기서 첫번째 그래프에서는 철저하게 숨어 있던 변수, 친아버지, 혹은 친부모의 IQ의 의미가 언뜻 드러난다. 바꿔 말해 고소득자들이 소득이 높은 이유를 그들의 IQ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IQ가 아이들에게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건 아닐까?

이쯤에서 IQ는 시험 성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IQ 높다고 시험을 꼭 잘 보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정확한 지적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는 건 통계적 분포다. IQ와 시험 성적의 상관관계를 그려보면 IQ가 높을수록 전반적으로 시험 성적이 좋을까 나쁠까? 결국 시험 성적과 생물학적 친부의 소득 역시 상관관계가 있을 거다.

물론, 우리는 이로부터 유전적 요인이 아이의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높은 소득과 같은 환경적 요인이 아이의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역시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면 이제 다른 그래프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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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래프는 부모의 소득과 아이가 자라서 가정을 꾸렸을 때의 소득을 나타낸 것으로, 빨간색은 아이가 친자인 경우, 파란색은 양자인 경우를 나타냈다. 빨간색의 그래프를 보면 부의 대물림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파란색의 그래프를 보면 그 효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그래프가 암시하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적 요인을 제거해놓고 봤을 때, 실제로 부의 대물림 효과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는 거다.

결국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니 애들 교육에 헛수고하지 말라는 운명론적 패배주의에 젖거나, 역시 아이들에게 질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는 게 제일 중요해라면 우생학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덜떨어진 결론을 내리라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돈 많은 집 아이들을 보면 비싸고 유명한 과외 선생 붙이고, 좋은 학원 보내서 좋은 대학 가더라”라며 마치 비싼 사교육만이 아이의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일차원적인 사고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모습을 보면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글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꺾었는가(How David Beats Goliath)”가 생각난다. 있는 집은 있는 집대로, 없는 집은 없는 집대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과외를 더 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애쓰려다보니, 여기저기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야근을 계속 하고…

그런데 정말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모든 부모가 자식들을 XX대 진학률 100%인 강남의 OO학원에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OO학원이 안 된다면 그나마 PP학원이라도”라며 똑같은 방식의 교육을 고집할 게 아니라, 아예 접근을 달리할 수도 있다.

좋은 학원 보내야/가야 한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오히려 아이들 학원을 덜 보내고, 나도 야근을 덜 하면, 내가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거다. 아이는 학교와 학원에서, 부모는 회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대신 같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와 시간을 보내며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됐을 때, 오히려 더 적은 시간을 공부하더라도 효율적으로 공부를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들은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면 뒤쳐지지 않을까?”라는 걱정, “저 학원에서 XX대를 XX명 보냈대! 저 학원에 우리 아이를 넣을 수만 있으면!”이라는 욕망(?) 때문에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 사회가 통째로(our society as a whole) “학원에 열심히 보내야만 XX대학에 보낼 수 있대”라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정말이지 알만한 사람들조차도 그러니 더 환장할 노릇이다.

더러는 "학원에 보내는 게 꼭 이점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라면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도 한다. 그런데 정말 밑져야 본전일까? 입시지옥 안에서 아이가 불행하고 미저러블해진다면, 그래도 본전일까? 아이가 즐겁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신들의 불안감을 없애자고, 부모로서 아이에게 남들하는 만큼은 했다는 자기 위로나 하기 위해 아이의 한번뿐인 청춘을 말려 죽인다면 그래도 본전일까?

또 행복과 같은 모호한 개념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아이를 학원에 보낼 돈을 다른데에 전혀 쓰지 않고 가스렌지로 불붙여 태워없앨 계획이 아니었던 이상, 절대로 밑져야 본전일 수는 없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란 이야기는 그 돈과 시간으로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달리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떤 교육 방법이 더 좋을까를 고민하는 게 귀찮은 부모들의 변명처럼 들린다.

결국 "남들보다 비싼 교육만이 살 길"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무엇이었는지, 그게 정말 근거는 있는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몇개에 의존해 내린 결론임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이라고 믿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 믿음 “저 학원에 보내면 XX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실제로 살찌우는 게 우리 아이의 양식, 우리 아이의 미래의 행복인지, 학원 선생의 주머니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꽤나 식은땀 나는 일이다.

@ 사실 지금 보여준 자료들은 미국과 스웨덴에 해당하는 거라,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정말이지 입시지옥을 겪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조사가 조금 더 진행됐으면 좋겠다. 특히 하루에 잠자는 시간 빼고 학교와 학원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실제로 효과가 있다/없다에 대한 연구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굴뚝 같은데, 이건 도저히 대조군 집단(비슷한 소득 수준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의해 학원에 안 보내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문제. orz 혹시 이미 이런 자료들이 있는데 제가 몰랐던 거라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 반값 등록금 문제로 말이 많은데, 이런 높은 등록금이 실제로 아이들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래 그래프는 소득 수준에 따른 아이들의 “대학 졸업률(진학률이 아니다!)”을 나타내는데, 아이의 성적에도 크게 좌우되지만 집안의 소득 수준도 분명히 이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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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11:41 2011/07/2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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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어느 정도는)

으아, 제목 한번 선정적이다. ㅡㅠㅡ 벤포드의 법칙이 어쩌고 지수 함수가 저쩌고, 비율이 이러쿵 17대1이 저러쿵하고 다 떠든 것도 결국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멍석 깔기. 자, 그럼 무슨 이야길 하려던 건지 풀어헤쳐 볼까나~.

사람은 자신의 타액은 아무런 맛이 없다고 느끼고, 자신의 콧속을 비롯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잘 못 맡고, 37도에 달하는 자신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렇듯 자신의 일반적인 몸상태를 기준점으로 맞추게 되면, 이 기준점에서 벗어나는 아주 작은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표현이 가능한 체온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의 체온은 보통 37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보다 1-2도 정도 온도가 높아지면 몸에 열이 난다고 이야기하고, 몸에 열이 있는 사람의 이마를 짚어보면 뜨겁다(따뜻하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아니면 목욕탕에서 40도 정도의 물을 열탕으로 분류하여 이 정도면 꽤 뜨겁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2-3도 정도의 온도 차이를 사실 온도의 관점에서 보면 별게 아니다. 우리는 보통 섭씨로 온도를 표현하지만, 어떤 물질이나 물체의 온도를 나타내는 절대적 단위는 따로 있어서 섭씨 온도에 약 273도를 더해주어야 한다. (이 절대온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자.)

즉, 사람 체온은 섭씨로는 37도지만 절대 온도로는 310도에 달한다. 310도를 기준으로 2-3도의 변화는 1%가 채 안 된다. 절대 온도의 관점에서 몸에 약간의 열이 있는 걸 감지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체온을 기준점인 0으로 삼는다면 2-3도의 변화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낄 수 있다.

이게 단순한 추측이 아닌 것이 실제로 사람은 37도와 39도의 차이는 비록 2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40도와 43도 사이의 3도 차이보다 크게 느낀다. 극단적으로는 물 온도가 80-90도쯤 된다면 사실 몇도 차이가 나든 다 똑같이 뜨거울 뿐 그 "상대적"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타액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맛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다른 음식의 맛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고, 평상시에 자신의 콧속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고 인식할 경우, 주변에서 그로부터 아주 작은 변화가 있는 미묘한 냄새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식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작은 변화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기도 한다.

자, 우선 다음 사진 한장을 보자. 이 사진에 사용된(?) 색을 식별할 수 있는대로 전부 나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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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색깔을 다 골라낸 분들은 클릭

진화 신경생물학자인 마크 창기지(Mark Changizi)[footnote]창기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링크를 안 걸면 섭섭하지.[/footnote]의 책 〈The Vision Revolution: How the Latest Research Overturns Everything We Thought We Knew About Human Vision〉[footnote]지금 아마존에서 킨들 버전이 $1.99 밖에 안 한다. 이 가격이라면 킨들이 있는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한다.[/footnote]에서 사용된 테스트(?)인데, 그 책을 통해 창기지는 인간의 시각이 몇가지 특수한 기능에 특화되게끔 진화해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특화된 기능 중 하나가 사람의 사소한 피부톤 변화에 대단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도 대단히 핵심적인 사회적 동물 인간에게 있어서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거나, 무서워서 창백해지거나, 어디가 아파서 누렇게 뜨는 일과 같은 작은 변화를 눈치채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혹은 자신과 유사한 피부색의 기본 상태에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액과 콧속은 아무런 맛도 냄새도 없다고 느끼고, 자신의 체온을 뜨겁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흰색을 아무런 색이 없는 상태로 파악한다. 그렇지만 이는 색상에 대한 기계적인(?) 분류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사람의 시각 기관인 눈과 시신경은 실제로 자신 혹은 그와 비슷한 피부색을 기준점인 0으로 맞춤으로써 그로부터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색에 대한 감각 때문에 앞선 사진에서 아무것도 없는 색인 흰색은 눈에 확 들어와도, 아이들의 피부색은 분명히 하나의 고유한 색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레이더망을 피해가는, “눈에 띄지 않는 색”이 된다. 창기지는 이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단어는 거의 모든 언어를 망라하고 잘 없다는 거다.

요새는 특정 색깔을 살색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적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아는데, 실제로 내가 어릴 때 크레파스의 색깔 중에 “살색”이란 색이 있었다. 딱히 사람의 피부색을 닮았냐하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빨간색, 녹색, 검정색 등 색깔 자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살의 색깔”을 별도의 단어로 구분해야 한다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긴 하다. (이런 또 다른 케이스는 오렌지색 정도가 있다.)

창가지는 이렇듯 사람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피부색의 아주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는 보통 사과가 빨갛다고 한다. 그런데 사과 한박스를 사서 뜯어보면 사실 사과의 색깔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다양한 색깔들을 전부 빨간색으로 묶어 버린다.

이렇듯 색깔을 하나로 묶어서 분류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생김을 뜻한다. “사과는 빨갛다”는 식의 말이다. 반면에 사람의 피부색을 어떤 한가지 색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이에 대해 스테레오타입을 갖지 않고, 그 피부색의 미묘한 차이와 변화를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피부색을 인식하게끔 진화한 결과 인종차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수만년간 비슷한 환경 하에서 같이 진화해온 사람들 이외의 피부색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런 다른 피부색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기준점 0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피부톤의 변화는 그만큼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극단적인 일례로 부끄러워서 홍조를 띈 흑인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거다. 그리고 흑인들의 피부색을 “검다”고 묶어버림으로써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이는 흑인들의 경우 다양한 감정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피부색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황인의 피부톤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그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이렇듯 우리와 다른 피부색에 둔감한 것이 어찌보면 진화의 결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인종차별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려는 이야기는 정확히 그 반대다.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무엇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은 우리만큼 다양한 감정 변화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며 그들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다양한 감정 변화가 발현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우리와는 조금 다른 존재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줄 수 있게 되는 거다.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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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쯤 되면 짜증나겠지만 클릭, 파닥파닥 파닥파닥. -_-,,

2011/07/24 00:02 2011/07/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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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벤포드의 법칙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이는 이글과 이 다음 글(은 아마도 내일 올릴… 수 있겠지?)을 쓰기 위한 맛뵈기.

우리는 어릴 때 숫자 세는 법을 배운다. 우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으로 가는 자연수를 배우고, 0, -1, -2, -3 이런 식으로 정수에 대해 배운다. 그 다음에 1.2, 1/3 같은 유리수, π 따위의 무리수를 배우고 나면 숫자선을 꽉 채우게 된다. 이런 숫자선은 선형적 숫자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선형적이라 함은 각 눈금에 표시된 숫자 사이의 차이가 일정하다는 걸로 이해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1과 2, 2와 3, 3과 4는 모두 그 차이가 1이다.

이런 식의 수의 개념과 셈법은 상점에 가서 사과를 7개 사거나, 파를 2단 살 때, 사온 감자 한 푸대에 감자가 몇개 들었나 확인하거나, 대학원 졸업에 맞춰 졸업 논문을 몇부 찍어야 할지 계산할 때, 줄자를 갖고 집 현관문의 높이와 너비를 잴 때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다. 당연히 숫자는 한개, 두개, 세개, 혹은 10cm, 20cm, 30cm 이런 식으로 세는 게 정상적이고 직관적일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제 막 말을 익히고, 숫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아주 어린 아이들은 보통 1, 2, 3까지는 쉽게 이해하지만 그 이상의 숫자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가끔 사람들이 간단한 산수를 실수하는 친구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너는 “1, 2, 3 다음에 많이냐?”라고 놀리는 일이 있는데, 아이들이 갖고 있는 수의 개념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1이라고 다 똑같은 1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자, 다음의 그림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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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상자에는 빨간 점이 몇개 있는가? 1개다, 쉽다. 가운데 상자에는? 2개, 이것도 쉽다. 오른쪽 상자에는 3개. 질문을 바꿔서 가운데 상자에는 왼쪽 상자에 비해 빨간 점이 몇개가 더 많을까? 1개. 오른쪽 상자와 왼쪽 상자를 비교하면? 2개. 이것도 무리없다.

자, 그러면 이번엔 아래 그림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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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상자에는 빨간 점이 몇개 있는가? 헉, 세기 귀찮아! 오른쪽 상자도 마찬가지. 그래, 그럼 점이 몇개인지 정확히 세는 건 어렵다 치고, 왼쪽 상자와 오른쪽 상자 간에 빨간 점의 갯수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숫자를 세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 대략이라도? 글쎄,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참고로 왼쪽 상자에는 40개의 점이, 오른쪽에는 41개의 점이 있다. 점 갯수의 차이는 앞선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1개임에도 불구하고, 점의 갯수가 적을 때는 1개 차이가 또렷하게 느껴졌는데, 점의 갯수가 많아지니 1개 차이는 별개 아닌 것 같다. 똑같은 1갠데 이상하네.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1개라고 다 똑같은 1개 생각하는 그 개념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사실 이를 우리는 대부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11명이 하는 스포츠 축구와 6명이 하는 스포츠 아이스하키, 5명이 하는 스포츠인 농구를 생각해보자. 이 스포츠들은 모두 선수 퇴장에 관한 규칙이 있는데, 축구에서는 선수가 퇴장 당하면 퇴장 당한 선수의 숫자만큼 부족한대로 끝까지 경기를 진행한다. 어떤 팀이 경기 시작하고 10분만에 1명의 선수를 잃었다고 하면 10명으로 남은 80분간 11명을 상대해야 한다. 심지어 2명을 잃어도 9명으로 경기를 진행해야 하고, 퇴장 당하는 선수가 한팀에서 4명 넘게 나오면 몰수패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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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에서도 선수가 퇴장 당하면 그만큼 선수가 부족한 채로 경기를 하게 되지만, 퇴장 당한 2분 후에는 다시 복귀가 가능하다. 반면에 농구에서는 어떤 선수가 퇴장 당하면 그 특정 선수가 경기 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이지, 선수 숫자가 부족한 상태로 경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농구의 퇴장 시스템이 축구의 시스템과 같다면 도대체 농구를 하란 거냐 말란 거냐며 난리가 날 거다. 이는 5명 중의 한 사람과 11명 중의 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다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도 사람이 모자라면 불리하지만, 농구에서만큼 심각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이 1,2명 부족한 팀이 의외로 승리를 거두는 일도 벌어지곤 한다. 이는 단순한 숫자 차이 이상으로 그 비율 역시 고려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앞선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등비 수열과 등차 수열의 차이이다. 아주 작은 숫자에서는 1, 2, 3, 4의 순서로 커지는 등차 수열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숫자가 커질수록 등차적 증감은 우리 머릿속에서 모호해진다. 천억과 십조는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알겠는데, 사실 둘다 엄청나게 큰수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대신 숫자가 커질수록 등비적 증감은 체감이 잘 된다. 아래 그림을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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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상자에 정확히 몇개의 빨간점이 있는지는 몰라도, 왼쪽 상자에 비해 오른쪽 상자에 훨씬 많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이그림을 이렇게 다시 그려보면 왼쪽보다 오른쪽에 2배쯤 많은 점이 있다는 것도 비교적 잘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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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숫자의 대소 개념을 배우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도 테스트를 해보면 3-4개까지는 1개 차이도 쉽게 식별해내는데 반해 10개 가까이 되기 시작하면 1-2개 차이는 잘 감지를 못하고, 점의 갯수가 2배 이상씩 차이가 나야 대충 어느게 많은지 적은지를 알아본다고 한다. 즉 8개와 10개의 차이는 모르지만 8개와 16개의 차이는 알아볼 수 있다고…

이는 사람이 진화해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게 현재의 가설이다. 작은 부족 단위로 먹을 것을 찾아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 어떤 부족의 인구가 30명이라면, 어떤 나무(?)에 달린 산딸기가 152개인지 157개인지를 세서 정확히 아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산딸기가 82개 달린 나무와 159개 달린 나무의 차이를 숫자를 세지 않고 직관적으로 식별해내는 능력에는 생존이 달릴 수도 있다.

또 부족간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우리 부족에서 싸우러 나갈 수 있는 남자가 40명이 있을 때,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방이 41명인지 42명인지를 정확히 아는 게 그렇게 도움이 많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보다 2배나 3배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똑같이 16명 차이라고 해서 102명이 118명과 싸우는 것과 1명이 17명을 상대로 싸우는 게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임창정의 17대 1이 놀라운 거다. (...라고 쓰고 그래서 임창정의 17대 1이 뻥인 거다...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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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3 11:17 2011/07/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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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려고 계획하고 있는 글이 하나 있는데, 지금 이글이 새로 쓸 글의 배경지식 역할을 할 수 있겠어서 작년에 썼던 글을 일단 재탕해 본다.

아브라모비츠-스테군(Abramowitz & Stegun)이란 물건이 있다. 밀튼 아브라모비츠(Milton Abramowitz)와 아이린 스테군(Irene Stegun) 두 사람이 미국 표준국(U.S. National Bureau of Standards, 현재는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로 개편)에서 Handbook of Mathematical Functions with Formulas, Graphs, and Mathematical Tables 편찬 작업을 맡아서 1964년 발행했는데, 제목 그대로 온갖(인간이 떠올려서 사용한 건 모두라고 보면 된다) 함수와 그래프 및 함수의 계산값을 도표로 정리한 핸드북 아닌 핸드북이다. Handbook of Mathematical Functions with Formulas, Graphs, and Mathematical Tables이라니, 그놈의 작명 센스 한번… 끌끌하고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이런 책 제목은 그저 그 내용을 잘 묘사하는 게(descriptive한 게) 미덕임. 이런 책에다가 “인간 대수학 및 함수론 지식 한계” 따위의 제목을 붙였다간 그거야 말로 낭패.

그리고 이 출판물의 애칭(?)으로 그냥 두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아브라모비츠-스테군이라고 한다. 아무튼 열흘쯤 전에 NIST가 이 핸드북을 온라인으로 풀었는데 경제학 이야기나 하느라고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이 나오고 1964 불과 2-30년 사이에 대부분의 계산은 컴퓨터가 도맡아 하게 되면서, 이 책의 쓸모는 상당히 줄었지만, 당시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다양한 함수들의 특성과 함수의 계산값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one book that rules them all-_-,,로서 꽤나 의미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1964년까지의 이론 물리학과 응용 수학의 역사가 담긴 책자다.

곱셈에서 덧셈으로

이 책에 실린 다양한 함수들 중에는 고등학교 때 배우는 log 함수(지수함수)도 포함돼 있다. 고등학교 때 다들 지긋지긋해 했던 건 아는데, 이 지수함수란 게 prime number theory부터 할 이야기가 많은 함수지만, 그런 복잡한 얘기들은 다 집어 치우고, 이 지수함수가 아주 유용하게 써먹히는 동네가 하나 있다. 바로 곱셈이다. 응?

자,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에 앞서 퀴즈 하나. 2.64 + 1.32 = ? 너무 쉽다고? 그럼 2.65 x 1.32 = ? 계산하기 귀찮아. -_-,, 그렇다, 자릿수만 맞출줄 알면 거의 어지간한 건 다 암산으로 가능한 덧셈에 비해 곱셈은 너무 너무 성가시고 복잡하다. 곱셈은 구구단을 외워야만 가능하지만, 덧셈표 따위를 외우는 일은 없는 것도 마찬가지. 나눗셈으로 들어가면 한술 더 뜬다. 사칙연산이라고 해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한묶음 취급하지만 사실 인간에겐 덧셈, 뺄셈이 곱셈, 나눗셈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고 편리한 계산법이다.

그리고 지수함수의 신비 중 하나는 곱셈을 덧셈으로 바꿔주는 함수라는 거다. 자, 고등학교 수학시간으로 잠깐 돌아가보자.

Ca x Cb = Ca+b

기억들 하시나? 이 따위것, 기억할 리가! 묻는 내가 바보지. 뭐, 기억 안 난다고 해서 지금 이걸 증명해줄 건 아니고, 이게 참이라고 치고 이야길 계속 하자. 잘 보라, 좌변과 우변을 각각 살펴보면 좌변에 포함된 연산은 곱셈인데, 우변에 포함된 연산은 덧셈이다. 모든 숫자는 임의의 밑(base)와 지수(exponent)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 2 = 21 = 100.301 , 30 = 24.907 = 101.477) 이 원리를 응용하면 곱셈을 덧셈으로, 덧셈을 곱셈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하다.

2 x 30 = 100.301+ 101.477= 100.301 + 1.407 = 101.778 = 60.

여기서 등장하는 게 지수함수다. log 2 = log 100.301 = 0.301. 이때 숫자 2의 밑(base) 10에 대한 지수가 0.301이라고 하거나, 숫자 2에 밑이 10인 log를 취하면 0.301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두수의 곱은 각수의 밑 10에 대한 지수–깐깐한 양반들이 태클 걸까봐 한마디 하자면, 밑이 10일 필요는 없다만, 편의상 로그표는 밑이 10인 소위 상용로그를 이용하므로 여기서도 별 언급이 없으면 밑은 10인 걸로 하겠음–를 더한 후 (2의 지수 0.301, 3의 지수 1.477을 더한 후), 그 합한 값을 지수로 갖는 수(지수가 1.778인 수인 60)를 찾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로그표를 이용하여 곱셈을 아주 신속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로그표란 0에서 10 사이의 숫자들에 log를 취해 얻은 지수들을 표로 정리해놓은 거다. 즉, 사실 지수를 계산하는 건 곱셈에 비해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에, 직접 로그값을 계산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면, 아무리 덧셈이 곱셈보다 쉽다고 하더라도 곱셈을 직접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0과 10 사이의 숫자들에 대해서는 log값을 계산해 놓은 방대한 표(라기보다는 책)가 있어서 사전 찾듯이 찾아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래서 옛날에 끈기 있는 사람들은 밥먹고 앉아서는 0과 10 사이의 로그값을 계산, 이를 표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사실 19세기말 20세기초중반 정도가 고작–은 이 표를 이용해서 곱셈을 해야하는 숫자들의 지수를 찾고, 또 찾은 지수들을 더한 후에, 그 최종 합을 지수로 갖는 숫자를 다시 이 표에서 찾아보는 방식으로 복잡한 곱셈을 처리해왔다. (여기서 퀴즈 하나, 로그표는 왜 10 이상의 숫자는 취급을 안 할까?)

호기심 많은 벤포드

1938년의 어느날 당시 GE에서 일하던 프랭크 벤포드(Frank Benford)라는 물리학자가 곱셈을 하기 위해 언제나처럼 자신의 로그표를 뒤적이며 계산을 하던 도중, 다소 의아한 걸 발견한다. 책장들을 가만히 보니 책 앞부분의 페이지들이 뒷부분보다 떼도 많이 타고, 너덜거리는 쪽들도 많고, 여러모로 훼손도 많이 된 거다. 마치 지금까지 꾸준히 이 책의 앞부분만 더 열심히 펼쳐본 것처럼. 원래가 각종 교과서를 비롯해 세상의 재미없는 책들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읽다가 포기하고, 나중에 다시 읽을 땐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마련인지라, 책 앞쪽이 더 빨리 닳게 마련. 그리고 수십, 수백 페이지 빼곡히 숫자만 표로 한가득 싫어놓은 책보다 더 재미없는 책이 어디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라고 생각을 했다면 그게 당신과 벤포드의 차이. ㅡㅠㅡ

로그표라는 건 그야말로 필요할 때 자신이 원하는 숫자만 들쳐보면 되는 사전 같은 것이다보니 굳이 맨 앞쪽부터 시작할 이유가 없다. 사전 뒤져볼 때 ㅎ으로 시작하는 단어 찾는답시고 ㄱ부터 차례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 그래서 벤포드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혹시? 세상에 1,2,3으로 시작하는 숫자가 7,8,9로 시작하는 숫자들보다 더 많은 거 아냐? 그러니까 자기가 로그표를 찾아볼 때 1,2,3을 7,8,9보다 찾아볼 일이 더 잦기 때문에 책앞쪽이 훨씬 빨리 닳은 게 아니냐는 발상이다.

이런 씨앙, 말이 안 되잖아. 숫자라는 건 어차피 사람이 임의로 정한 건데, 1이 9보다 특별할 이유따위가 어딨냐고. 아래 그림과 같이 0부터 10까지의 숫자선이 있다고 하고, 눈 딱 감고 다트를 찍을 경우 1에서 2사이에 다트가 맞을 확률–어떤 숫자가 1.XX일 확률–이나, 9에서 10사이에 맞을 확률–9.XX가 나올 확률–이나 다 똑 같아야 하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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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신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벤포드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통계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각종 분자량, 야구 기록, 인구, 주식 시장, 사람들의 소득, 기업체들의 매출, 강의 길이, 산의 높이, 건물들의 높이 등 숫자로 기록될만한 것들은 샅샅이 뒤져본 결과! 제일 첫자리가 1로 시작하는 숫자는 전체 숫자들 중 10분의 1이 아니라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반면, 2로 시작하는 숫자는 약 6분의 1, 3은 8분의 1로 점점 줄어서 8로 시작하는 숫자는 전체 숫자들 중 불과 20분의 1, 9로 시작하는 숫자는 22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으엑? 무슨 이런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과연 정말 어처구니 없을까? 자, 숫자들을 다시 살펴보자. 음, 뭐가 좋을까? 그래, 인구가 좋겠다. 우리는 보통 인구 증감을 말할 때 몇 퍼센트가 증가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왜 일까? 그 이유는 인구 증감에는 비율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네명씩 꼬박꼬박 낳고, 네번째 아이를 낳고는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처음 두 사람은 네 사람을 세상에 남기고 간다. 그러면 이 네 사람은 여덟사람을 남기고 갈 거고, 여덟 사람은 16, 32, 64, 이렇게 증가할 거다. 꼭 2배씩이 아니어도 좋다. 보통 전세대와 그 다음세대 사이의 인구는 일정한 비율로 증가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뿐이다.

아하! 응? 왜 아하인지 모르겠다고? 자, 그러면 1부터 시작해서 계속 2씩 곱해보자. 제일 첫자리수에 주목하시라. 1, 2, 4, 8, 16, 32, 64, 128, 256, 512, 1024, 2048, 4096, 8192, 16384, 32768, 65536, 131072, 262144, 524288, 1048566...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색깔이 빨간색으로 총 21개의 숫자 중 7번이나 된다. 그 다음에 2가 4번, 3이 2번, 4가 2번, 5가 2번, 6이 2번, 8이 2번, 그리고 7과 9는 0번... 물론 샘플이 겨우 21개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우연이 아니다.

등차 vs 등비, 그리고 벤포드의 법칙

자,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보자 1년에 사과를 10개 달리는 사과 나무 한그루 가진 사람과 그와 비슷한 나무를 1000그루를 갖고 매년 사과를 10000개씩 생산하는 사과 농장 주인을 생각해보자. 사과 나무 하나 가진 사람이 어느해 사과를 20개 생산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에 사과를 10000개씩 생산하는 사람이 어느해 사과를 10010개 생산할 확률은 그리 나쁘지 않다. 1000그루의 나무 중에 10그루에서 사과가 11개씩 달리면 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20-10=10이고 10010-10000=10이지만 이 10개는 똑같은 10개가 아니다. 20 나누기 10은 자그마치 2배 차이지만 10010 나누기 10000 = 1.001로 이는 고작 0.1%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산술적 혹은 등차적 증가와 기하급수적 혹은 등비적 증가의 차이다. 그리고 등차적 증가에서는 숫자 자체가 고르게 퍼지지만, 등비적 증가는 곱셈에 의한 증가로, 등비인 곱셈을 덧셈으로 치환해주는 열쇠인 바로 지수가 고르게 퍼진다.

앞서서 세상에 존재하는 숫자들이 균일한 숫자선을 이루고 그 숫자선상에 고르게 퍼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이는 일리 있는 말이다. 다만 숫자 자체가 균일한 숫자선을 이루는 게 아니라, 이런 숫자들의 지수들이 균일하게 분포하는 거다. 즉, 아래와 같은 숫자선을 떠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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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칸 사이의 차이는 불과 9에 불과한데, 그다음 한칸 사이의 차이는 90, 그 다음 한칸은 900, 이런 식이다. 이 경우 1과 10 사이, 10과 100 사이, 100과 1000 사이의 숫자들을 역시 등비적 분포에 맞춰 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이 퍼진다. (100부터 103 사이만 확대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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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1이랑 2, 10이랑 20, 100이랑 200사이가 9랑 10, 90이랑 100, 900이랑 1000 사이보다, 넓네. 자, 이 숫자선에다가 두눈 딱 감고 다트를 던져보자. 그러면 숫자의 제일 첫자리가 1(1.XX, 1X.XX, 1XX.XX 등)이 나올 확률은 전체의 약 1/3인 반면 9(9.XX, 9X.XX, 9XX.XXX 등)가 나올 확률은 고작 1/22이다! 이게 바로 벤포드의 발견의 핵심, 그리고 이를 벤포드의 이름을 따서 벤포드의 법칙(Benford’s Law! 자그마치 법칙이다!)이라고 한다.

벤포드와 범죄 수사대

그래 고작 이런 거나 고민하고 있다니, 다들 정말 한가하십니다! 아, 과학의 매력은 물론 이런 한가한 고민 자체를 즐기는 거기도 하지만, 이런 한가한 고민이 의외의 순간에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도 한다는 데에 있다. 1978년 벤포드 법칙이 의외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벤포드의 법칙을 알면, 범죄자를 잡아낼 수 있다. 응?

예를 들어 누군가 탈세를 하고 있다거나, 회사의 장부를 조작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면? 소득이나 매출 같은 숫자들도 인구나 (사과의) 생산성과 마찬가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게 정상적인 양이기 때문에 벤포드 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런 숫자의 오묘한 비밀을 모른 채 탈세를 위해 소득을 거짓 신고하는 경우, 등차적 숫자 개념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차숫자선 상에서 무작위로 숫자를 골라내기 때문에 벤포드 법칙을 따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탈세, 사기 등의 재판 과정에서 이 벤포드 법칙에 어긋난 경우는 탈세의 증거로 채택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물론 아이러니(?)는 벤포드의 법칙이 보편화 되면 될수록, 장부 조작시에 이를 적용하여 조작하게 될 거기 때문에 조작의 단서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

에필로그

마치 벤포드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글을 쓰긴 했는데, 세상의 모든 통계치가 벤포드의 법칙을 따르는 건 아니다. 통계에서 많이 쓰이는 정규 분포(사람의 키 따위)는 분포도가 가장 많은 어떤 값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분포(평균보다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의 분포가 대칭적이기)하기 때문에 벤포드의 법칙과는 상관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벤포드 법칙이 유효한 경우는 등비적 증감이 일어나는 경우들이다. 그러면 강의 길이나, 폭, 건물의 높이 등이 왜 벤포드 법칙을 따르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뭔가 명쾌한 해석을 접한 일이 없다. 등차적 숫자 개념에 익숙한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음. 그걸 이해하게 되는 어느날이 있다면 또 포스팅하지, 뭐. ㅡㅠㅡ


낚이셨습니까? 파닥파닥. 그럼 클릭

2011/07/22 18:31 2011/07/2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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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 OS X Lion이 나왔다. 요새 우리나라는 모바일 하드웨어와 SNS 등과 관련한 IT 소식이 블로그스피어와 SNS에 범람하는 관계로 나까지 굳이 나서서 이런 소식을 남보다 한발 앞서 전할 필요는 없고, 그냥 Lion을 써보고 할 얘기가 하나 생겨서...

뭐, 잡스횽아가 아무리 혁명적이네 어쩌네 호들갑을 떨어도 사실 뭐 혁명적으로 바뀐 건 없고, Apple이 요새 멀티 터치 인터페이스를 열심히 밀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아주 사소한 변화가 사용성에 상당히 큰 변화를 일으킨 부분이 하나 있다.

트랙패드에 손가락 올려놓고 스크롤하는 방향과 관련해서 natural scroll이란 게 등장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지금까지 컴퓨터 화면 스크롤의 개념은 우측에 스크롤바가 있어서 스크롤 바의 위치를 조절하는 형식이었다. 스크롤바를 밑으로 내리면 상대적으로 화면에 표시된 내용이 위로 밀려 올라간다. 기존에는 트랙패드에 두손가락을 대고 손가락을 움직이면, 이 방향으로 스크롤바가 따라 움직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화면 자체는 손가락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iPhone과 iPad 같은 태블릿에서는 화면에 직접 손을 대고 페이지를 넘기는 식이라 이런 접근이 직관적이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하다. 화면을 잡고 넘길 경우에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화면이 같이 움직인다. 흥미로운 건 Apple이 이번에 스크롤바 대신에 화면을 컨트럴하는 방식을 Lion에 적용시켰다. 이게 대단히 직관적일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용해보면 과거의 습관 때문에 엄청 헷갈린다는 거다. 태블릿에서는 절대로 헷갈리지 않을 것 같음에도 실제로 화면에 손을 대는 대신에 별도의 컨트롤러인 트랙패드에 손을 댄다는 이유만으로 "직관성"이 깨진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컴퓨터의 웹캠이나 iPhone의 전방 카메라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사진을 찍기 전에 화면 상에 보이는 이미지와 사진 찍은 후 사진의 좌우가 뒤바뀌는 걸 알 거다. 이는 사진을 찍은 후에 쓸데없이 좌우를 뒤집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기 전에 화면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사실은 좌우가 뒤바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거울을 이용해왔기 때문에, 거울속의 좌우가 뒤바뀐 모습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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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가 바뀐 게 뭐 대수냐고? 위의 그림처럼 거울 2개를 90도로 놓고, L자의 구석 부분을 보면 자신의 거울속 이미지가 좌우가 뒤바뀌지 않은 상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정작 이 거울속의 자신을 보면서 머리를 빗거나, 면도를 하고, 이를 닦는 일 따위를 해보면 뭔가 어색하다.

오른손을 움직이면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사람의 직관은 그 반대다. 사람의 뇌는 좌우가 바뀐 이미지를 보면서 시운동통합(visual-motor integration) 또는 눈손협응(hand-eye coordination)을 이루게끔 훈련돼 있기 때문에, 좌우가 뒤집히지 않은 모습을 기준으로 동작을 하게 되면 뇌에서 눈손협응에 교란이 발생하는 거다.

그래서 의외로 무엇이 직관적인지를 직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고, 직관은 많은 부분에서 경험에 의존한다. 그렇다보니 "직관적"이어야 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트랙패드에서의 소위 "natural scroll"은 좌우가 안 뒤집히는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 기분이다.

@ 아, 헷갈린다. 그렇지만 인간의 뇌란 또 놀라운 물건이라 조금 지나면 금방 적응할 거다. 혹시라도 Lion이 깔린 컴퓨터와 그 이전 버전이 깔린 컴퓨터를 수시로 번갈아가면서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다.(라고 말은 해도 물론 트랙패드 설정에서 natural scroll을 끄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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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낚이셨다면 클릭 ㅋㅋㅋ

2011/07/21 12:06 2011/07/2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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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시드니 모르겐베서(Sidney Morgenbesser)는 디저트를 주문하기로 했다. 웨이트리스로부터 애플 파이와 블루베리 파이의 두가지 메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드니는 애플 파이를 주문한다. 잠시 후 웨이트리스가 돌아와서는 메뉴에 체리 파이도 있는데 자신이 깜박했다는 이야길 전한다. 그 이야길 들은 모르겐베서 , "그렇다면 블루베리 파이로 주세요."

얼마전에 황당한 규칙이 불러낸 축구계의 웃지못할 코메디(-_-a)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종목을 바꿔 피겨 스케이팅 이야길 해보자. 자, 당신이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참가했다고 하자. 쇼트 프로그램은 이미 모두 치뤄졌고, 롱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가운데, 참가자 중 마지막 1명의 연기를 남겨 놓았다. 현재까지는 당신이 종합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자, 최악의 경우에 당신은 몇위를 하게 될까?

정답은 3위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오타 아니고 3위다. 응? 이 양반이 잠꼬대는 자면서나 할 것이지 어디서 두눈 뜨고 인터넷질하면서까지 정신 못차리고 잠꼬대를 하고 앉았냐고? “내가 현재 1위를 달리고 있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연기가 남았다면, 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더라도 최소 2위 확보지 어떻게 3위로 밀려나냐? 멀쩡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정신나간 사람일세”라고 따지기들 전에 지금으로부터 9년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래도 축구계의 코메디는 축구 변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대회에서 벌어졌지, 지금 이야기할 이 사건은 무려 올림픽이다, 올림픽.)

미국의 사라 휴즈, 미셸 콴, 사샤 코엔 세사람과 러시아의 이리나 슬르츠카야가 메달 경쟁을 펼쳤던 이 대회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올림픽처럼 큰 무대에서 덜 떨어진 인간이 계산기를 잘못 두드렸나? 아니면 다른 멍충이가 막판에 순위 입력을 잘못 했나?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당시의 순위 결정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선수의 연기가 끝나고 나면 전광판에 9명의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뜬다. 기술과 표현 각각에 대해 6.0 만점으로 점수가 표시된다. 그런데 이 심시위원의 평가 점수로 종합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니라, 각 프로그램별로 순위가 결정되고 나면, 이 순위를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새로 점수를 부여한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1위 0.5점, 2위 1점, 3위 1.5점 등, 순위가 1단계 내려갈 때마다 0.5점씩을 더 받는다. 롱 프로그램에서는 1위 1점, 2위 2점, 3위 3점 식으로 순위가 1단계 내려갈 때마다 1점씩을 더 받는다. 그래서 이 환산 점수의 총합이 낮을수록 종합 순위가 높은 그런 방식이다.

쇼트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콴, 슬르츠카야, 코엔, 휴즈의 순서로 1위부터 4위를 차지하였다. 둘째날 롱 프로그램이 펼쳐졌고, 슬르츠카야의 연기의 있기 전까지 롱 프로그램의 순위는 휴즈, 콴, 코엔 순이었고, 쇼트와 롱을 합친 종합 순위는 콴, 휴즈, 코엔의 순이였다. 이를 표로 정리해보자.

순위이름종합쇼트
12.50.52.0
2휴즈3.02.01.0
3코엔4.51.53.0
4슬르츠카야미정1.0미정

그리고 남은 슬르츠카야의 연기. 슬르츠카야의 연기 결과가 어찌 되든 콴은 1위 아니면 최소 2위, 휴즈는 끽해야 2위, 자칫하면 3위가 되야 정상 아닐까? 그런데 정작 연기가 끝나고 슬르츠카야의 점수가 공개됐고, 그녀는 롱 프로그램에서 휴즈의 뒤를 이어 2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결과를 포함시키고 나자 종합 순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순위이름종합쇼트
1휴즈*3.02.01.0
2슬르츠카야3.01.02.0
33.50.53.0
4코엔5.51.54.0

*종합 점수가 동점일 경우에는 롱 프로그램 점수가 타이브레이커. 그래서 휴즈가 1위, 슬르츠카야가 2위.

슬르츠카야가 콴에 앞선 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어쩐 일인지 콴보다 순위가 낮던 휴즈가 갑자기 콴과 슬르츠카야를 모두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이다. 아니, 콴과 휴즈의 연기가 모두 끝난 시점에서 두 사람간의 상대적 우위가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도대체 제 3자(슬르츠카야)의 연기 내용에 의해서 왜 두 사람 사이의 순위가 뒤바뀌냔 말이다!1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참 이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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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회적 선택 이론(social choice theory)에서 A와 B 사이의 선호도를 결정하는데 C의 존재 여부는 상관이 없어야 한다는 이 개념을 무관한 대안으로부터의 독립의 원칙(independence of irrelevant alternatives)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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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1 00:35 2011/07/2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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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scientific discovery is named after its original discoverer.

꽤나 오래전에 S모사에서 아폴로11호의 달착륙 영상과 함께 닐 암스트롱, 버즈 앨드린을 언급하며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카피로 초일류 그룹을 꿈꾸는 자사 이미지 올리기용 광고를 때려대던 시절이 있다. (지금은 올림픽 유치하라고 회장님 사면도 시켜주고, 그러고보면 성공했네, 끄응.) 시카고 대학의 통계학자 스티븐 M. 스티글러(Stephen M. Stigler)가 이 광고를 봤더라면 대굴대굴 굴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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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일단 퀴즈(?) 하나, 다음의 것들1이 지닌 공통점은?

  • 알츠하이머병
  • 아라빅 숫자
  • 오일러 공식
  • 가우스 분포
  • 파스칼의 삼각형
  • 다윈의 진화론
  • 살모넬라균
  • 스티글러의 법칙

답은 발명한 사람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발명한 사람(혹은 지역)의 이름이 사용된 과학 법칙이나 질병, 현상 등이란 점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스티븐 스티글러가 1980년에 논문을 하나 발표하는데 그 논문의 내용인즉슨, 이렇게 사람 이름이 들어간 과학 법칙이나 현상 등을 수없이 조사해봤더니, 최초의 발견자의 이름이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더라는 것이었다. 위의 리스트는 전부 그런 사례들이다.

스티글러는 보통 두번째나 심지어는 그 이후의 발견자, 또는 최초 발견의 내용을 더 잘 다듬은 사람들의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더라며, 이를 스티글러의 명명법칙(Stigler’s law of eponymy)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면서 이 명명법칙도 사실은 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Robert K. Merton)이 먼저 발견했다는 아이러니를 스스로 인정하고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더니, 1등도 기억하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뭐, 허긴, 나만 봐도... 멍~~)

1 더 많은 리스트를 보실 분들은 (여기)를 클릭



재밌게 읽으셨다면 클릭

2011/07/20 09:26 2011/07/2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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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19 11:22 최박사

기사 : [사람들]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김현수 동장

조선일보가 뭐라고 생각하든 이게 사실 과학 기사는 아닌데, 신문사 피드 구독 분류상으로는 과학으로 분류돼서 올라왔더라고. 바보, 조선일보. -_-,, 아무튼 뭐, 남자도 앉아서 오줌 눠도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 기사를 봤더니 그냥 이 만화가 생각났다는 이야기.


the pros and cons of a man sitting down to pee

만화 출처 : http://theoatmeal.com/

@ 아니, 뭐, 그냥 생각 났다고...

@@ 근데 기사 중 "또 하나의 팁은 앉아서 일을 보는 동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돼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서서는 생각 못 함? 로뎅이 동상 하나 잘못 만든 덕에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군. -_-a



웃으면 지는 거다... 아, 이게 아니라 웃었으면 클릭
2011/07/19 11:22 2011/07/1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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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런 칼럼이 있었는데 열흘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네. 친구의 소개(?)로 알았다.

일단 이 칼럼부터 일독을 권한다 : 한의학은 과학이다

한의학과 과학

시작에 앞서 한가지 분명히 해두자. “한의학은 과학이다”라는 제목의 글에 “나의 과학은 이렇지 않아” 시리즈를 쓴다는 것만으로 “한의학의 모든 원리는 과학적으로 틀렸다”거나 “한의학은 과학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는 점,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다만 한의학이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있음에도, 한의학자들이,

반면 한의학은 역사적 경험과 한의사들의 직관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적 사고의 틀로 구축된 현재의 교육시스템하에서는 사람들이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주목 받고 있는 복잡계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착각에 빠져 있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다. (횽아가 늬들을 아껴서 이러는 거다.)

사실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착각에 빠지는 데에는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 이론 따위가 과학적 성과의 상징이 되면서 “과학=이론”이란 이미지가 굉장히 강하다. 실험실에서 완벽하게 재현이 가능한 이런 종류의 과학적 법칙들에 대한 자부심이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불신과 냉소로 이어졌고, 과학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도 이런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가 여부에 크게 좌우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럴 듯한 이론이 없으면 과학이 아닌 것 같이 취급된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 단위에서 주로 연구를 행하는 물리학과 화학 중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과학적 탐구 대상들도 대부분 굉장히 복잡하다. 기고문을 쓴 사람도 사람, 뇌, 경제, 생태계, 자연 등의 복잡계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복잡계에서는, 손에 들고 있던 공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100%의 재현성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강한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다.

도핑과 통계학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스포츠에서 도핑이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데, 우리는 도핑 테스트를 하면 어떤 사람이 금지약물을 복용했는지 안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긍정 오류(false positive)와 부정 오류(false negative) 따위가 발생하는데, 이를 테스트 방법의 기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정밀도만 높이면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문제. 그런데 사실 도핑 테스트 방법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이런 오류들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보통은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람의 혈액에는 금지약물의 성분이 섞여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혈액은 깨끗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Kaiser Fung의 〈Numbers Rule Your World: The Hidden Influence of Probablities and Statistics on Everything You Do〉를 참고.)

유산소 운동 선수들에 대한 도핑 테스트 중 하나로 (적)혈구 레벨을 측정한다. 혈구 레벨은 보통의 남성이 46% 정도고, 50%가 넘으면 굉장히 높은 편이다. 적혈구는 혈액 내의 산소 운반자로, 적혈구 수치가 높아지면 혈액이 산소를 더 많이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장거리 육상이나 사이클 같은 유산소 운동 선수들에게는 대단히 유리해진다. 그래서 적혈구 수치가 높은 혈액을 바로 수혈하는 방법부터 해서 EPO라는 호르몬 주입 등 적혈구 수치를 높이기 위한 도핑 방법은 상당히 다양하게 발달해 왔고, 국제 사이클 연맹은 혈구 레벨이 50%가 넘으면 도핑을 했다고 간주, 선수들을 실격시켰다.

그런데 고산지대에서는 산소를 포함한 대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보통 몸이 적혈구 수치를 높임으로써 몸에 산소가 모자라지 않게끔 적응한다. 이런 사람들 중 약 20% 정도는 자연적으로 적혈구 레벨이 50%가 넘는다. 문제는 자연적으로 적혈구 수치가 높은 사람과 도핑으로 인해 적혈구 수치가 높은 사람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 사이클 연맹 기준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실격 처리가 된다. 이게 바로 긍정 오류(false positive)다. 이런 피해자를 막기 위해 도핑 의심 레벨을 55%로 올리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대신에 도핑을 하고도 안 걸리는 사람, 즉 부정 오류(false negative)가 늘어난다. 이렇다 보니 긍정 오류와 부정 오류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는 테스트의 정밀도, 즉 혈액 중 혈구 레벨을 소숫점 몇째짜리까지 정확히 검사할 수 있는지를 발전시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도핑을 하면 적혈구 수치가 오른다는 건 “과학적 원리”이지만, 이 원리를 알고 있다고 도핑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지는 않다. 그래서 실제 세계에서 도핑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통계, 일반적으로 적혈구 수치는 46%이고, 50%를 잘 넘지 않는다는 통계에 기반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몸과 같은 복잡계를 다루는 학문, 생물이나 의학에서 이 내재적 불확실성을 피해갈 방법은 없다.

공을 손에서 놓으면 무조건 땅에 떨어지듯이, 사람에 관계없이 어떤 약을 먹으면 어떤 병이 무조건 낳는다고 한다면 이런 논의는 전부 무의미하겠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약을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줬을 때 그 약효가 완전히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약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줌으로써만 그 약의 “평균적인/일반적인” 효능을 알 수 있다. 어떤 약이나 시술이 효과가 있는지를 임상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병리학과 임상실험

병의 구체적인 원인을 이해하려는 병리학이나 생리학은 사실 그 접근법은 대단히 환원주의적이다. A 때문에 B가 발생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동작 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EPO 도핑을 하면 혈구가 오른다 따위를 밝혀낼 수 있듯, 술은 간에 무리를 준다는 것 따위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병리학에 기초를 해서 손상된 간을 회복시키는 약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 약효를 검증받기 위해서는 임상 실험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병리학도 과학이지만, 이렇게 약효를 검증받는 과정 역시 과학이고, 과학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분야다.

사실 의학이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병리학의 발전보다도 이런 약효의 “과학적 검증 방법”을 택한 것이 훨씬 크게 작용한다. 병리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도 의학이 과학의 범주 안에서 발전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 내가 여러분한테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무슨 병이든 상관이 없다. 감기 같은 가벼운 병부터, 알츠하이머 같은 정신질환, 암과 같은 죽을 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병에 다 듣는다며, 여러분이 태어난 마을이나 동네에서 흙 한줌과 지하수 한동이를 구해오라고 한다. 그 흙을 아주아주아주 곱게 갈아서 각종 약재 몇가지와 지하수에 섞은 후 한약 달이듯이 달인다. 그리고 이를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한다. 아마도 여러분은 나를 미친놈이라고 할 거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이걸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게 있고, 또 이 말도 안 되는 약에 본인의 건강을 걸어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면, 이 약에 대해 대조군 임상 실험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약이 실제로 효과가 있더라/없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병리학이 없이 사람 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블랙박스 취급을 해버리고도 의학이 발전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의미다.

그러면 병리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느냐? 인체를 블랙박스로 취급한다고 모든 종류의 약들(혹은 사이비 약들)이 다 비슷한 정도로 테스트해볼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환자들에게 어느 구름에 비가 숨었는지 모른다며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먹여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근거가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은 약을 주는 입장에서도 먹는 입장에서도 중요하다.

만약 내가 앞서 말한 약을 그냥 주는 대신에 “모든 인간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엄마의 기운을 받아서 건강하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기가 허해져서 병을 앓게 된다며, 자신이 태어난 대지와 물의 기운을 되돌려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반쯤은 정신 나간 이야기를 한다면, “오, 어딘가 그럴 듯한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면, 임상실험이 가능해지고, 이 약효를 과학적으로 점검하는 게 가능해진다. 병리학이 의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은 서사에 약하기 때문이다.

한의학이 과학이 되려면

그렇지만 약을 파는 사람이 생각하는 “왜 약의 효능이 있는가”에 대한 원인과 “실제로 어떤 약이 왜 효능이 있는가”가 반드시 맞아떨어져야 하는 건 아니고, 또 반드시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다. 가끔 어떤 약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 때문에 효과가 있기도 하고, 또 아무리 생각해봐도 병리학적으로는 효과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약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때도 있다. 의학과 의술에 있어서만큼은 결국에 병리학보다 임상실험이 중요하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병리학과 임상 실험의 연결관계는 제쳐두고 이런 종류의 딴소리를 하면 참 답답하다.

한의학은 병의 원인을 증상이 발생하는 부분에서 찾지 않고 전일주의적 관점에서 병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의학에서는 보고, 듣고, 묻고, 만져보는 망문문절(望聞問切)의 4가지 진단기법을 활용해 병의 원인을 비선형적 방법으로 진단한다. 각 방법에서 얻어진 정보 분석은 현대과학으로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각 방법에서 얻어진 수많은 정보의 상호작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병을 진단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은 현대 과학기술로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의학에서는 수천년 동안 축적되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4진을 통해 얻은 정보를 해석하고 병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하고 있다.

한의학이 “기와 혈”에 대해 이야기하고, 망문문절의 진단법을 이용하고, 직관에 의존하고, 전일주의적 접근을 하는 건 다 좋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병리학에 대해서 서양 의학과는 달리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아무리 그럴 듯한 설명을 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한의학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건 한의학이 갖고 있는 전일주의적 접근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다. 그 병리학을 어떤 방법을 이용해 증명할 것인가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아직은 한의학이 설명하는 병의 원인과 치유 과정을 신뢰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은만큼 한의학이 효과가 있다는 걸 검증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수백년 수천년의 경험, 그 긴 시간을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한의학의 효과가 검증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한의학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과학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직관과 아무리 많은 일화도 그 자체로는 과학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으로서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수백년간 변비약으로 수은을 먹기도 했다. 수은은 결국 몸에 나쁘다는 게 판단되면서 사라지지 않았냐며, “한의학은 그것보다 오래 살아남았으니까 괜찮아”라고 주장한다면 남자애들이 누구 좆이 더 큰가를 갖고 누가 더 잘났는지 싸우는 것만큼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정말 한의학이 과학이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도 한의학이 과학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가? 한의학이 과학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이런 머저리 같은 글을 쓰고 있는 한 그렇게 되기는 요원하다. 최근의 추세를 봤을 때 한의학이 설 땅이 갈수록 좁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한의학이 정말로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민간요법 취급을 받다가 그냥 사라져버린다면, 그건 인류에게 상당한 손실일 거다. 그래서 더더욱 한의학자들이 이런 식의 실제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항의(?)를 할 시간에 차라리 대조군 임상 실험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우고, 시행에 옮기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소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무언가를 "이건 과학이야"라고 말한다고 과학이 되지는 않는다. (You can't make something into science by saying it's science.)

여기서 잠깐! 서양의학도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도 과학이 아닌 영역이 대단히 많다. 속이 탈 나서 병원에 가면 신경성이네요, 머리가 빠져서 병원에 가면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습니다,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서 피부과에 가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과로하지 마세요. 이러고 앉았다. -_-,, 이거, 의사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런 종류의 의술 행위는 과학 아니다, 사실.

서양의학 중 과학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인슐린과 몇몇 항생제, 개복 수술, 신약에 대한 임상 시험을 하는 경우와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 X-ray로 몇번째 갈비뼈의 어디가 부러졌는지 보여주거나, 종양이 있을 경우 사진을 찍어서 정확히 어디에 얼만한 덩어리가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조영술/촬영술 정도? 그 외에 서양의학이 일상생활에서 실천되는 방식은 변비 걸렸다고 수은 먹이던 시절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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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10:13 2011/07/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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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 맛있게 굽기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17 00:17 최박사

갑자기 웬 스테이크 타령이냐?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는 데에도 과학이 있다는 사실. 이에 대해 알아보고, 스테이크를 맛있게 구워먹어 봅시다!

잠깐! 수비드의 원리 따위에는 관심 없고, 그저 스테이크를 맛있게 만드는 "방법"만 알면 된다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최근 몇년 사이에 스테이크 뿐만이 아니라 고기를 익히는 방법으로 수비드(sous-vide)란 방법이 요리사들 사이에서 각광 받고 있다. 수비드란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어로 “진공을 잡았다 (under vacuum)”는 뜻인데, 고기를 진공 포장을 하여 조리하는 방법이라 이렇게 부른다. 응, 고기를 진공 포장? 그걸 어떻게 요리하냐고?

컨셉은 아주 간단하다. 진공 포장 전용 기기를 사용해도 되지만, 사실 레스토랑도 아닌데 이런 특화된 주방기기를 누가 갖고 있겠냐 싶은 사람들은 지퍼백을 사용하면 된다. 지퍼백에 요리하고자 하는 고기를 넣고는 공기를 쪽 빼서 밀봉을 한 후에 이를 통째로 따뜻한 물에 집어 넣어 물중탕으로 고기를 천천히 오래 익히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와 컨셉은 다르다보니 실제로 이를 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물온도는 낮게는 15도부터 높게는 70도 정도로 맞추게 되어 있는데, 이 온도가 심하게 변하지 않게 잘 관찰해야 하고, 조리 시간은 짧게는 1시간 반에서 길게는 사흘까지도 걸린다. 그러면 고기 하나 굽자고 왜 이런 삽질을 하고 앉았냐고?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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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일한 핑크빛이 빛나는 촉촉한 미디엄-레어 스테이크, 스테이크 조리에도 과학이 있다!

첫째로, 육즙의 보존이다. 높아야 70도의 물에서 조리를 하는 것이라 물의 끓는점(100도)보다 훨씬 낮은 온도에서 조리되기 때문에 육즙이 증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진공 밀봉 포장이 된 상태로 조리가 되기 때문에 조리 도중에 육즙이 달아날 곳이 없어 100% 보존된다. 특히 스테이크를 구울 때 고기의 한면을 강한 불에 바싹 구운 후, 불을 줄이고 뒤집어서 고기를 천천히 구우면 육즙이 달아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이는 잘못 알려진 상식이다.

이렇게 한면을 바짝 익히면 그 면이 딱딱(?)해지면서 육즙이 달아나지 못하게 가두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고기가 딱딱해지다보니 뚜껑(?) 같은 역할을 할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생겨난 헛소문(?)이다. 사실 사람 눈으로 보기에 고기가 딱딱하다고 하더라도 분자 단위에서 물이 달아나는 걸 막을 수 있는 정도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게다가 고기를 강한 불에 익힐 경우 “치이익~”하고 고기 익는 소리가 나는데, 이 치이익 소리가 왜 나느냐? 이게 수분이 끓어 증발하는 소리인데, 고기에 있는 수분이란 게 결국은 육즙 아닌가! 따라서 육즙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치이익 소리가 무조건 나쁘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사람도 파블로의 개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고기 구을 때 나는 치이익 소리를 듣고, 육즙이 증발하면서 나는 고기 굽는 냄새에 반응해서 침이 괴게 마련이다. 이렇게 침이 괴다보니 고기를 먹을 때 침과 육즙을 혼돈하면서 실제보다 육즙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효과가 난다. 미각을 포함한 인간의 감각에 꽤나 주관적 구석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이유로든 저런 이유로든 맛있게 느끼기만 하면 그만 아님? ㅋㅋ 그렇지만 아무리 개인의 감각과 경험이란 게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맛있는 게 맛있는 거지. 괜히 수비드가 각광을 받는 게 아니다.

수비드의 두번째 장점은 고기를 겉부터 속까지 아주 균일하게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릴이나 팬에서 고기를 익힐 때는 고기의 한면만을 가열해서 요리를 하게되는데, 이때는 고기의 부위별로 온도 차이가 많이 난다. 우선 불(혹은 그릴이나 팬)과 맞닿는 면의 온도는 높다. 팬과 맞닿은 면은 보통 100도가 넘는데, 반면에 공기와 노출된 윗면에서는 열이 계속 달아나기 때문에 윗면의 온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이렇다보니 스테이크 속을 잘 굽기 위해서는 스테이크 아랫면에 많은 열을 가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스테이크의 온도는 계속 오르겠지만, 스테이크의 윗면은 아랫면에 비해 여전히 온도가 낮은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는 스테이크의 속까지 잘 굽기 위해서는 스테이크의 아랫면이 타기 쉽고, 타지 않더라도 스테이크의 단면을 보면 겉의 바싹 익은 회갈색부터 가장 안쪽의 핑크빛까지 색이 균일하지 않고, 그라데이션이 있다. 그만큼 맛도 균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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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이용한 스테이크 요리 시에는 시간이 지나서 스테이크가 익어도 윗면과 아랫면 사이에 온도 차이와 조리 정도의 차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반면데 수비드 방식으로 요리를 할 경우 스테이크의 모든 방향에서 열이 가해지기 때문에 열이 스테이크 안으로만 전달될 뿐 밖으로 달아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아무리 오래 조리를 해도 스테이크의 온도는 물의 온도 이상으로 오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스테이크 겉과 속 모두 물의 온도와 같아 진다. 따라서 이후에 토치나 그릴에 구울 스테이크의 가장 바깥 부분만 빼면 스테이크 안쪽이 아주 균일한 색과 맛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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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드 방식으로 스테이크 요리시에는 시간이 지나면 스테이크 전체가 물온도와 같아지면서 균일한 조리 상태 및 맛을 띈다.

보통 스테이크의 요리 상태를 나타내는 레어, 미디엄, 웰던의 경우 스테이크 가장 안쪽의 온도에 의해 결정되므로, 수비드로 요리를 할 때는 물의 온도를 얼마로 맞춰 놓느냐에 의해서 스테이크의 구워진 정도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 결국 수비드 요리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얼마나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수비드 스테이크 만들기

자, 그러면 이론 이야기는 그만 하고, 어떻게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재료 : 두께가 3cm 이상 되는 스테이크, 소금, 후추, 온도계, 냄비 또는 아이스 박스

  1. 스테이크를 소금과 후추로 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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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툼한 채끝 스테이크


  3. 스테이크를 진공 포장을 한다. 이때 고기와 함께 약간의 버터를 같이 넣어줘도 좋다. 진공 포장기가 없을 경우 지퍼백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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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고기를 온수에 담근다. 온수 온도는 다음의 공식에 따라 맞추고, 온도만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1시간 반이나 2시간 동안 놔둔다. (사실 수비드 조리법의 또 하나 장점은 고기 내부가 물온도와 같아질 정도의 시간 이상이라면 얼마나 오래 두든 크게 상관이 없다. 물온도만으로 결정되는 고기의 최종 온도가 조리의 유일한 척도이므로 고기가 타거나 너무 과하게 익을 것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

    레어 : 50-55도

    미디엄-레어 : 55-60도

    미디엄 : 60-62.5도

    미디엄-웰던 : 62.5-65도

    웰던 : 65-7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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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스테이크를 온수에 담군 후 2시간 동안 놔둔다. 열이 달아나는 걸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 뚜껑은 닫아 둔다. 30분 간격으로 물온도를 확인하며, 거의 그럴 일이 없겠지만 필요할 경우(=위에 나온 목표 설정 온도의 하한선보다 낮아질 경우) 끓는 물을 조금 추가하면서 온도를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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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퍼백 안의 촉촉한 스테이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퍼백에 남은 이게 다 육즙


  9. 스테이크를 지퍼백에서 꺼낸 후 키친타월로 물기를 조금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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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온도에서 조리한 까닭에 겉모습이 그다지 먹음직스럽지는 않다.


  11. 토치를 이용하여 스테이크의 겉만 익혀준다. 토치가 없을 경우 후라이팬을 바짝 달궈서 사용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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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치로 겉을 익혔더니 이제 좀 먹음직해 보이네


  13.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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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혀 그라데이션이 없는 균일한 핑크빛 (58-60도에서 조리)


Tip 1. 지퍼백으로 스테이크를 포장할 때, 공기 안 들어가게 하는 방법 : 고기와 버터를 지퍼백에 넣은 후 지퍼백 입구 3-5cm 정도만을 남기고 지퍼백을 닫는다. 손으로 밀어 적당히 공기를 빼낸다. 큰 그릇에 물을 받은 후 지퍼백을 물에 담그면 수압이 공기를 밀어내면서 지퍼백이 공기에 밀착된다. 터놓은 지퍼백 입구쪽으로 점차적으로 물에 담그면서 공기를 빼낸 후 지퍼백을 밀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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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2. 수비드의 핵심은 온수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에 달렸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immersion circulator라는 장비가 사용되는데, 물에 담궈 사용하는 온도계가 내장된 발열 장치로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비이다. 그러나 무척 고가의 장비로 최근에는 수비드용 전용 온수 오븐도 제작돼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장비.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 위해 다음의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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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ersion circulator, 요샌 요리사들도 많이 쓰지만 원랜 실험장비로 제작된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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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sVide Supreme사에서 나온 Sous Vide 전용 온수 오븐, 아, 하나 갖고 싶다.

  1. 튀김용 온도계와 냄비를 이용한다. 튀김용 온도계를 냄비에 꽂아둔 상태에서 수온이 원하는 온도보다 높아지면 냄비에 찬물을 조금씩 붓고, 수온이 조금 떨어지면 불을 조금씩 키우면서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스테이크를 굽는 동안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만큼 다소 피곤한 방법이다.

  2.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아이스박스를 이용하는 거다. 오늘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면서, 어제밤까지만 해도 1번의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떠오른 방법. 이거 예상대로 처음에 수온만 잘 맞춰주면 무지하게 쉽다!

    수비드에서 중요한 건 수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거다. 그러려면 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거고, 물을 담아둔 용기가 단열이 잘 된다면 굳이 계속 냄비를 이용할 필요가 없을 거다. 그러다 생각난 게, 아이스박스를 이용하면 꽤나 오랫동안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란 사실이었다.

    이때 냉장 상태의 고기를 물에 넣어야 하므로, 고기를 넣는 순간에 수온이 약간 떨어진다. 이를 위해 원래 예상했던 수온보다 살짝 높은 온도의 물을 아이스박스에 준비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60도에서 조리를 원할 경우, 300g(반근)짜리 스테이크를와 20L 아이스박스의 절반(10L) 가량 물을 채워서 사용한다면, 처음에 61.2도로 물을 준비한다. 이는 물과 쇠고기의 비열을 감안하여 (2/3000) x (최종온도:60도) x (스테이크무게:300g) / (물의 양:10L)의 공식에 따라 계산된 온도만큼 원하는 최종 온도에 더해줌으로써 얻을 수 있다.

    Tip 2.2.1. 아이스박스란 게 완벽하게 단열이 되는 게 아니다보니 온수를 채워둔 후에 그냥 놔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온도가 떨어진다. 물의 열용량을 키우면 비슷한 정도의 열손실로도 상대적으로 온도 하락폭은 줄어드므로 10L 이상의 용량이 큰 아이스박스가 유리하다. 물 10L 기준으로 1시간 반동안 2도 정도 유실되는데, 이 정도라면 스테이크를 굽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Tip 2.2.2. 일을 덜기 위해, 찬물을 굳이 냄비나 전기포트에 데우는 대신에 싱크대나 샤워기에서 바로 따뜻한 물을 받아다 사용하면 좋다. 보통 목욕탕의 열탕이 40도 정도고, 60도 정도면 처음에 살에 닿을 때는 뜨거운지 잘 모르지만 1-2초 후면 매우 뜨겁다고 느껴지는 정도의 온도이니 이를 기준으로 적당히 온도를 맞춘 후 원하는 온도보다 높으면 찬물을 조금, 낮으면 전기포트로 끓는 물을 조금씩 추가하면서 온도를 맞춰준다. 단, 대부분의 아이스박스의 내열 온도가 80도이니 이를 넘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Tip 3. 물중탕을 이용한 조리가 끝나고 나면 그냥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사실 색깔도 희뿌여 멀건 것이 그다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스테이크라고 하면 떠오르는 약간은 과하게 익은 스테이크의 모습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부탄 토치를 이용하여 스테이크를 익혀주자. 그렇지만 토치가 없더라도 너무 당황은 마시라. 토치가 없을 경우에는 후라이팬이나 그릴을 아주 강한 불에 달군 후 스테이크 앞뒷면만 잽싸게 구워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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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밝아서 파란 불꽃이 잘 안 보이네.

@ 조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이폰 카메라로 찍었더니 사진이 아무래도 좀 아쉽군요. 사진으로 보기엔 별 거 없어 보여도 진짜 맛있습니다, ㅋㅋㅋ.

@@ 제목이 스테이크 "굽기"라고 돼 있는데, 그러고보니 이건 굽기는 아니군화, 하하핫,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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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7 00:17 2011/07/1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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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사 하나 : 인터넷검색 의존이 기억력 저하시킨다

제목을 보는 순간 왠지 평소에 그럴 것 같더라는 심증이 가던 내용을 확인 받은 느낌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다. 특히 예전에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TV만 보는 걸 걱정하던, 그렇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며 걱정하고, 어린 아이들이 너무 일찍 계산기를 사용하는 걸 걱정하는 부모들로서는 날로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근거없는 믿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기사 첫문장부터 화끈하다.

인터넷 검색이 기억력을 저하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기사에서는 정확히 언급이 안 됐는데 무려 Science에 발표된 연구 결과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 이후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로 “기억력을 저하”시킨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연구 결과의 핵심은 사람들은 외부 기억(external memory)에 접근이 쉬워지면 다양한 사실과 지식들을 기억하기보다는 그런 사실과 지식을 외부 기억의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를 기억한다는 내용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박학다식한 만능 박사 친구에게 물어보던 걸, 이제는 인터넷에게 물어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게 그 말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한다/않는다는 것과 즉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떨어진다는 것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자, 이쯤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테스트를 한번 해보자. 테스트를 시작하면 15장의 이미지들이 매우 빨리 지나갈 것이다. 이 테스트의 목표는 이 이미지들을 보고 난 후에 무슨 이미지들이었는지 최대한 많이 기억해내는 것이다.

테스트 시작

이 테스트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은 컴퓨터 하드에 데이터를 저장하듯, 자신이 본 건 모두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을 하고 있는데, 이를 찾아내지 못할 뿐이라는 게 아니다. 이 테스트는 뇌의 작동 원리를 파헤치기 위해 과학적으로 설계된 테스트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 하드처럼 동작하지 않는다는 게 최근 뇌과학계의 정설이다. 단지, 이 테스트를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억력 경연대회에 대해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를 나갔다가 사람의 기억력에 대해 흥미를 갖고는 스스로 기억력 개발 학습법을 익혀 미국 기억력 경연대회 1위를 차지한 조슈아 포어(Joshua Foer)라는 기자가 있다.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인간의 뇌와 기억력에 대해서도 꽤나 흥미롭게 성찰한 〈Moonwalking with Einstein: The Art and Science of Remembering Everything〉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을 보면 문자의 발명이 인간의 기억 체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인 고든 벨(Gordon Bell)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디지털 아카이브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내부 기억(internal memory)과 외부 기억(external memory)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동작하는지에 대한 꽤나 흥미로운 논의가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을 권한다.

아무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과 지식들을 머릿속에 담아뒀다가 언제든지 꺼내쓸 수 있는 형태의 기억력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지식들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맥락과 의미를 형성하느냐다. 어떤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그 사실을 언제 어디서 찾아서 확인할 수 있는가를 기억하고 있는 것/아는 것도 유용한 일이다. 니콜라스 카르(Nicholas Carr)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이런 이유로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 Minds like sieves. 이런 우려는 귀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지만, “인터넷이 기억력을 저하시킨다”는 한줄 요약은 이 연구 결과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똑똑하게” 살아야 하는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학습법을 포함한 삶의 방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렇지만 진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 환경의 끊임없는 변화에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대응/적응하고 있다는 거다. 브라질의 수도가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걸로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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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의 새로운 시도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15 16:27 최박사

서남표 총장이 KAIST에서 대면 강의를 줄이고, 그 빈 자리를 동영상/온라인 강의로 매울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나보다. 이와 관련해 부정적인 반응이 많은데, 이게 정말 이 정책에 대한 건지, 서총장이 하는 건 다 싫은 건지 잘 모르겠는 반응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대학 교육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 학생들이 뭘 이해하고 뭘 모르는지 잘 알고 있는 명강사가 재미있는 일화들과 이해하기 쉬운 예시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내용의 교과목을 알기 쉽게 가르친다. 학생들의 가렵던 곳을 벅벅 긁어주는 이 명강사는 단순히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만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강의실 밖에서 대학 생활에 있어서 학생들이 어떤 점을 어려워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성품도 온화해서 학생들이 믿고 따른다. 학생들은 강의 시간 중에 여전히 잘 모르겠는 내용이 있어도 모르는 내용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도 적극적으로 하고,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논의가 활발히 이뤄진다. 또, 평소에도 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교수들을 서슴없이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대학 생활이라면 이래야 할 것 같다.

자,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10년째 똑같은 과목을 강의하는 강사들은 7년전부터 강의 노트에 토씨 한번 바꾸지 않았다. 교과서 개정판이 나와도 교과서만 바뀔 뿐 강의 노트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학생이 뭘 아는지, 뭘 궁금해 하는지 알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학생들은 출석 체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앉지만 50분 강의 중 22분 48초 정도는 꿈속을 헤맨다. 질문은 궁금한 것이 있는 학생이 교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가 졸고 있는 학생에게 “어이~, 저기 맨 뒤에 앉아서 조는 녀석, 쟤 좀 깨워보게. 학생, 내가 방금 무슨 얘기했나?”라고 할 뿐이다.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강사 뒷마마를 까기에 바쁘고, 교수를 찾아가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지라 학교 생활이 힘들어도 교수를 한번 찾아가 상담을 하고 조언을 구하느니, 차라리 1년간 수능을 다시 공부해 의대나 치대를 가고 만다. 그렇지만 막상 학교를 옮겨봐도 사는 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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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지금 대학들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수많은 사람이 얽힌 여느 사회/정치/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문제고,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확률이 높다. 이런 문제의 해답은 어떤 특정 개인의 혜안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이 모두 좋은 성과를 낼 리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 중 대부분이 좋은 성과를 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실패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실패에 대해 강박적인 두려움을 안고 있고, 특히 지도자의 실패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냉정하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올해 나온 팀 하포드(Tim Harford)의 새 책 〈Adapt: Why Success Always Starts with Failure〉가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하포드는 새로운 시도에 있어서 3요소, 다양성(variation), 생존가능성(survivability), 그리고 선택(selec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양성이란 말 그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것. 생존가능성이란 그런 시도들을 함에 있어서 그런 시도들이 실패하더라도 조직 전체가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의 규모에서 시도할 것. 그리고 선택이란 이런 실패들로부터 계속 피드백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방법을 만들어/골라낼 것.

들어보면 무척이나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능은 사실 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한큐에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과 완벽한 정보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한큐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다양성과 생존가능성, 그리고 선택에 의한 제도 보완에 회의적이다.

그렇다보니 흥미로운 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봤을 때 우리가 대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의 해법에 대해 우리 앞에 놓인 현실보다도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과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서총장의 동영상 강의에 대해 현재 대학 강의란 것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보다도, 대학 강의란 어때야 하는가와 비교하여 그 시도의 장단을 가려낸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였던가, 터치였던가에 “이상형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말 한번 참 잘했다. 그 어떤 제도적 보완도 우리의 이상과는 상대가 안 된다.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이를 이루려는 노력이 헛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마법은 없기에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건 좋다는 거다. 어떤 시도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듯이, 어떤 시도는 해보나마나라고 확신하는 것 역시 바보 같은 일이다. 물론 해보고 실패할 경우 “거봐, 해보나마나였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 정확히 배우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움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서 시도해 보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시험적으로 동영상 강의를 도입해보는 것에 찬성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게 당연히 결과가 좋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해도 상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 이 제도를 시행하려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강의에서 인간적 교류가 사라질 거라고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서 교수와 인간적인 유대를 느껴 봤던가? 또 어떤 사람들은 강의의 흐름이 일방적일 것을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의 중에 교수에게 질문을 던져봤던가? 다른 학생들은 다 아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면 바보 같아 보일까봐, 아니면 나때문에 진도 다 못 나가면 눈치 보이니까 따위의 이유로 궁금하게 있음에도 참았던 일들은 없었나? 또 강의시간에 필기하느라 정작 교수가 하던 이야기를 놓치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어떻게 보면 돌려 볼 수도 있고,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강의를 일시 정지시켜놓고 얼마든지 메모도 할 수 있는, 강의 페이스를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동영상 강의가 정말 나쁘기만 할까?

학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경험하는 일을 박탈당하는 것이 두렵다면 다음과 같은 보완책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소수의 몇몇 특출난 강사에게 강의를 전담시킬 수 있다면, 다른 교수들은 그만큼 강의 준비와 실제 강의를 하는 일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게 번 시간의 일부를 강의실이 아닌 곳에서 소규모의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에 할애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문제를 풀기를 원할 때 우리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다. 그 중에 어떤 아이디어는 딱 봐도 멍청하고, 어떤 아이디어는 딱 봐도 대박이다. 그렇지만 딱 봐도 멍청한 아이디어가 항상 실패하고, 딱 봐도 대박인 아이디어가 항상 성공하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아이디어가 똑같이 가치 있다거나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해봐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떤 제도에 대한 비판이 이런 시도가 지금 우리의 모습에 비해 얼마나 좋을까/나쁠까에 대한 논의 대신 이런 시도로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비교해서는” 한참 모자란 결과밖에 못 얻을 게 뻔해라는 것뿐이라면, 그런 공격은 그저 너무나 가볍고 쉬워서, 문자 그대로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로 논의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It adds nothing to the discussion.)

이런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게 기계적이고 강제적인 만남을 통해 어떻게 인간적 유대가 생기고, 사제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겠냐고. 아주 좋은 지적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 지적이 정확한만큼, 우리가 안고 있는 숙제의 종류 역시 명확해진다. 결국 이 모든 뿌리에는 어떤 제도, 이를 테면 단순히 대면 강의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는 일, 교수/총장과 학생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을 통해 사제간/학생들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이 시스템 안의 구성원들, 총장, 직원, 교수, 학생 모두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렸다. 오늘날 많은 대학 강의가 형편 없는 이유도, 동영상 강의가 학교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강의실 밖에서 학생-교수가 만나는 일이 기계적이고 무의미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결국 그 뿌리에는 딱 한가지 이유뿐이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총장-교수-직원-학생간에 관심도, 신뢰도 없기 때문이다.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연구할 시간을 뺏는 시간 낭비, 학생은 교수를 만나는 일을 늙은 꼰대의 잔소리 듣는 일, 총장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치기어린 아이들의 투정으로 취급하는 한 뭘 해도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학교육의 로망에 가까운 케이스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강의를 했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강의를 했기"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은 문제는 어떻게 강의를 할 것인가와는 전혀 별개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만들 것인가일 것이고, 이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충분히 해볼 필요가 있다.

자, 그러면 이 문제의 해법은 뭘까?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이 다소 균일하고 일방적이더라도 좋은 강사의 질좋은 강의를 듣는 것이, 교수 전반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여할 리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저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는 것, 그뿐이다.

@ 아, 그렇지만 서총장이 무조건 잘 했다는 건 아니다. 이번 일과 관련해 서총장이 엄청나게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들이 있다. 다만 그 비판의 촛점은 전적으로 다른 부분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왜 (이렇게 자주) 학교 내부자들이 언론으로부터 새로운 정책에 대한 소식을 접해야 하는가와 과연 제도가 실패했을 때 실패를 인정할 각오가 돼 있는가다. 그 외에 이 제도가 전적으로 쓸모없다는 논의는 앞서 말한 이유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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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16:27 2011/07/1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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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둥근 공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14 13:43 최박사
오늘 내일은 새글 쓸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capcold님이 재밌다고 해주신 블로그에 글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응? 왜 안 되는데? 에, 그러니까 그게... 긁적 -_-a) 2011년도 됐겠다, 옛날에 다른 데 썼던 글을 살짝 손만 봐서 퍼옵니다. 2011년이 반도 넘게 지난 시점에서 난데없이 2011년 타령은 또 뭐고? 읽어 보시면 압니다. ㅡㅠㅡ

일단은 (3년 된) 기사 링크 하나.

Roundest Objects in the World Created (세상에서 가장 둥근 물체 제작)

제목만 봐서는 대뜸 '그런 건 뭐할라고?'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게 왜 뉴스거린데?'까지의 반응예상. 뭐, 먹고사니즘에 입각해봤을 땐 다 지당하신 말씀. 그래서 사실 뉴스 소스도 NewScientist 아니겠어? ㅡㅠㅡ


간추린 뉴스

일단 위 기사를 읽기 싫은 분들을 위해 기사를 한줄 요약하자면 '얼마나 무거워야 1kg만큼 무거운지 정확히 알 자신이 없어진(이라고 하면 어폐가 좀 있다만 넘어가자. ㅡㅠㅡ)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름이 93.75mm 짜리 실리콘 구형을 2개 제작했다'는 거다. 한줄만 더 얹자면 '인류 역사상 가장 구형에 가까운 물건으로 지름이 들쭉날쭉한 정도가 0.000000003m에 불과하다'고... 이 배경엔 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이제부터 풀어헤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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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둥근 공



국제도량형국의 탄생

자, 지금으로부터 133년전 프랑스 파리로 가보자. 산업혁명과 더불어 공산품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각국들은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1860년대 말부터 이일에 꽤나 적극적으로 총대를 매고 앞장서던 프랑스가 미터 조약 체결을 위해 세계 각국에 초청장을 뿌린다. 이 초청에 20개국이 응했고, 1875년 5월 20일 이중 17개국이 이 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국제도량형국(The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sures, 약칭 BIPM)이 탄생한다.

이때 메트릭 시스템이 채택된 것은 아니지만,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통용되던 메트릭 시스템이 대세였던 건 사실. 제 갈 길 가기에 바쁜--정말이지 이름부터 싸가지 없는 -_- Imperial Units를 갖고 있던--영국 대표단은 '대표단'이란 이름이 무색하게시리 막판에 '에이, 우리가 어떻게 우리 국가를 대표해서 이런 거에 함부로 싸인하겠어'라는 이유를 들며 서명 거부. -_-,, 정말 요새 미국인들 하는 짓은 영국인들이 다 하던 짓 같다, 아무리 봐도. -_-,, (물론 1884년 영국은 뒤늦게 서명한다. 곧 이야기하겠지만 그래도 첫 표준이 공표되는 1889년 이전에 합류했다, 기특하다고 해줘야 하나. -_-,,)

17개국이 형제의 결의를 맺은...이 아니고 도량형을 통일하자고 약속한 1875년부터 14년 후인 1889년 드디어 국제표준이 공표된다. 이때 결정된 단위는 오늘날 MKS라고 하는 길이의 단위인 미터(m),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 그리고 시간의 단위인 초(s)로 SI 단위라고도 한다.

표준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들 수 있는 길이와 질량은 간단하다. 그냥 눈에 보이고, 손에 들리는 물건 하나씩 만들어 놓고, 이건 1m, 저건 1kg이라고 정해 놓으면 된다. 너무도 당연히 당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직관적인 접근을 사용하였고, 미터와 킬로그램은 플래티늄 90%에 이리듐 10%를 섞어 만든 물질로 각각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여 이들의 길이와 질량을 1m와 1kg으로 정의하였다. (미터의 경우 물의 어는 점에서 측정한 길이임.) 초는 지구 자전 주기의 86400분의 1을 1초로 정의하였다.

이 프로토타입의 원본은 파리 교외 세브르라는 동네에 위치한 BIPM 건물 지하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각 프로토타입은 1개의 원본과 5개의 대조본(?)으로 구성돼 있고, 이들이 보관된 금고는 3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그래서 1년에 한번씩 3명의 열쇠지기들이 모여 금고를 열어보고, 이 프로토타입이 제자리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컬트 종교의식 같은 일이 일어난다. -_-,, (그 외에 당시 조약 체결국이었던 나라들에 프로토타입의 사본들을 내보냈으며, 오늘날엔 질량 프로토타입이 세계 각지에 40개가 있다.)


국제 표준의 변화

그런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차이에 별로 민감하지 않겠지만, 과학자들은 쪼잔하다. -_-,, 다행히도 질량은 라부아지에의 위대한 업적 '질량 보존의 법칙' 덕분에 흔들리지 않는데, 이 1m라고 갖다 놓은 프로토타입은 온도가 쬐금만 바뀌어도 그 길이가 오르락 내리락한다. 그래서 1기압 하의 물의 어는 점에서 측정한 프로토타입의 길이를 1m로 정의한다고 온도까지 못박아놨는데, 어라, 그럼 이제 1기압을 정확히 알아야 되네. orz

1초는 또 어떤가? 지구 자전의 86400분의 1? 그럼 지구 자전의 1회전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젠데? 어, 그게 그러니까... -_-a

산 넘어 산이다. 우리의 쪼잔한 과학자들, 이를 견딜 수 없었다. 우리에겐 무언가 더 정확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진리에 근접한 그 무엇. 그리하여1889년의 표준은 그후 몇차례 손질 거쳐 오늘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1미터: 빛이 299,792,458분의 1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 (1983년)
  • 1초: 세슘-133 원자 기저상태의 하이퍼-파인 레벨 간에 발생하는 복사 파장의 주기의 9,192,631,770배. (와, 복잡하다. -_-,,)
그리고

1킬로그램



도대체 왜?

자,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도대체 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는 거야? 1m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쬐끔, 아주 쬐끔 길면 어떻고 아주 쬐끔 짧으면 또 어때?

정답은?


사실 표준이란 게 그렇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길이, 무게, 시간 등의 절대값은 애초에 정량화가 불가능하다. 어떤 표준의 배수로 표현될 뿐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당신 키가 169cm라는 건 1cm의 169배라는 것이고, 키가 170cm인 사람의 170분의 169만큼 크다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중요한 건 심하게 널뛰지 않는 적당히 믿을만한 표준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지, 그 표준이 정확히 얼마인가는 아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화폐다. 요새 신문 경제면만 폈다하면 물가 상승 이야기가 나오는데, 20년전에 100원이던 새우깡이 요샌 1000원(인가?)쯤 한다. 경제적 가치의 표준으로 삼는 화폐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떨어지게 돼 있고, 오늘날 짐바브웨이에서 같이 그 정도가 급격하지 않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경제 구조에서 화폐 가치의 소폭 하락은 늘 경제 성장을 동행/유도하므로 관점에 따라서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길이, 질량, 시간과 같이 물리적으로 접촉 가능한 개념은 사회/경제적인, 그래서 철저하게 인위적인 화폐와는 달라서 그 변동폭이 작더라도 인플레이션에서처럼 표준이 단방향으로 꾸준히 변하여 그 변화폭이 누적될 경우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잘라 놓은 금속 덩어리의 크기와 무게가 변한들 얼마나 변하겠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여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리는 실용성처럼 천박한-_- 개념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ㅡㅠㅡ 우리가 표준에게 원하는 건 불확정성의 최소화 한가지다. 실용은 MB나 드시면 되는 거고... ㅡㅠㅡ


질량 보존의 법칙

1774년 프랑스의 과학자 라부아지에는 화학반응 전후에 반응에 참여하는 모든 물질들의 무게 총합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질량 불변의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의 핵심은 너무도 간단하다. 물질은 그 형태나 성질을 바꿀 수는 있을지언정 새로이 생겨나거나 갑자기 펑~하고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물론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이는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틀림없이 어떤 자리에 놔뒀다고 생각한 물건이 필요할 때 찾아보면 그 자리에 없기 일쑤 아닌가. orz 불행히도 우리 눈앞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우리 기억력을 탓할 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ㅡㅠㅡ 물론 눈앞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한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부르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의심하지 않기도 한다. 에... 그러니까... 질량은 정말 보존되는 거야? ㅡㅠㅡ

그냥 보존된다고 하고 이야길 진행하면 안 될까? -_-a 내 블로근데 안 되긴 왜 안 되겠어. 암튼 똘똘하신 라부아지에 선생님 덕분에 질량 표준은 제작되는 순간 불변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1889년 제작된 프로토타입을 120년간 사용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프로토타입은 1kg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저울로 그 프로토타입의 무게를 재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토타입을 통해 저울의 눈금을 결정하게 돼 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우리는 철저하게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앞서 말했듯 프로토타입은 원본 외에 대조본이 있고,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40개가 있다. 이들은 각국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원본과 정기적인 대조를 통해 질량이 실제로 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함이다. 즉, 질량 보존의 법칙이 불변의 진리이고, 애초에 똑같은 질량의 물체를 40여개 만들었다면, 이들의 질량을 언제 어디서 비교하더라도 항상 같아야 한다. 그런데 골 때리게도 지난 120년간 프랑스에 있는 원본이 다른 표준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40마이크로그램(십억분의 40킬로그램) 정도 더 가벼워져 있더라는 거다.

120년 동안 십억분의 40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네.

그렇다, 아무것도 아니다. ㅡㅠ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선 난리가 났다. 길이의 경우 처음엔 인위적으로 제작된 표준에 따라 정의됐지만, 결국엔 빛의 속도라고 하는 자연현상을 통해 측정할 수 있는 값으로 대체된 현재--1889년 제작된 프로토타입은 아직도 질량 프로토타입과 함께 금고에 보관되어 있긴 하다--인위적 제작물에 의존해야 하는 질량의에 대한 불신이 확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과학자들은 쪼잔하다.


차라리 갯수를 세자

그리하여 2005년 국제도량형위원회가 열렸을 때, 새로운 질량 표준을 2011년까지 채택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질량 표준을 채택하자는 결의는 쉽지만, 새로운 질량 표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세상에서 가장 둥근 공이 등장한다. 이름하야 아보가드로 프로젝트. 아이디어는 이렇다.
  1. 일단 실리콘으로 공을 만든 후 부피를 측정한다.
  2. 실리콘의 원자 간격을 X선으로 측정한다.
  3. 위의 두단계를 통해 실리콘 공의 원자 갯수를 계산한다.
  4. 3의 원자수에 실리콘의 원자 질량을 곱하여 실리콘 공의 질량을 결정한다. (이 단계에서 아보가드로의 수가 6.02214179×1023으로 정의된다.)
  5. 기존의 프로토타입의 질량에 맞춰 실리콘 공을 갈아낸다.

실리콘을 이용하는 이유는 원자 간격을 측정하는 데에는 단일순결정 물질을 필요로 하는데, 실리콘은 이런 특성을 비교적 쉽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래야만 부피와 X선을 통해, 무게와는 전혀 무관하게 원자의 갯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실리콘 동이원소와 관련한 문제가 조금 있는데, 일단은 실리콘-28만으로 구성된 공을 만드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는 정도로 넘어가자.)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더. 실리콘으로 1kg을 정의한들, 현존하는 프로토타입처럼 앞으로 이 질량이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윽, 날카로운 녀석. ㅡㅠㅡ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실리콘의 경우 쉽게 산화되기 때문에 질량 변화의 요인이 더 많다. 즉, 실리콘 공은 불변의 프로토타입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원자수를 셈으로써 재생해낼 수 있는 질량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과연 문제 해결?

사실 질량 표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질량을 정의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 질량을 필요할 때 꺼내 쓰느냐이다. 예를 들면, 탄소-12 원자 50,184,508,190,229,061,679,538개를 1kg으로 정의를 하면, 1kg을 정확히 정의할 수는 있다. 그런데 정의만 할 수 있는 1kg은 소용이 없다. 막상 어떤 물질의 질량을 1kg과 비교해서 얼만한지 측정해야 할 경우 1kg 표준을 쉽게 재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길이와 시간은, 믿거나 말거나, 재생해내기 비교적 쉽게 다르다.) 무슨 수로 탄소 50,184,508,190,229,061,679,538개를 뽑아내느냔 말이다.

실리콘의 경우 결국은 위의 방법으로 그 갯수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실험실에서 재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플랑크 상수나 전하량을 통해 질량을 정의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래서 이제 2011년인데 결론은? 에... 없다. 1kg을 어떻게 정의할지 결정하는 일은 2015년으로 미뤄졌다. ㅡㅠㅡ


@ 힘차게 시작해서 맥빠지게 끝나는 결말, 과학 이야긴 역시 함부로 하면 안 돼.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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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4 13:43 2011/07/1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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