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의 새로운 시도

분류없음 RSS Icon ATOM Icon 2011/07/15 16:27 최박사

서남표 총장이 KAIST에서 대면 강의를 줄이고, 그 빈 자리를 동영상/온라인 강의로 매울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나보다. 이와 관련해 부정적인 반응이 많은데, 이게 정말 이 정책에 대한 건지, 서총장이 하는 건 다 싫은 건지 잘 모르겠는 반응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대학 교육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 학생들이 뭘 이해하고 뭘 모르는지 잘 알고 있는 명강사가 재미있는 일화들과 이해하기 쉬운 예시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내용의 교과목을 알기 쉽게 가르친다. 학생들의 가렵던 곳을 벅벅 긁어주는 이 명강사는 단순히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만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강의실 밖에서 대학 생활에 있어서 학생들이 어떤 점을 어려워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성품도 온화해서 학생들이 믿고 따른다. 학생들은 강의 시간 중에 여전히 잘 모르겠는 내용이 있어도 모르는 내용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도 적극적으로 하고,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논의가 활발히 이뤄진다. 또, 평소에도 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교수들을 서슴없이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대학 생활이라면 이래야 할 것 같다.

자,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10년째 똑같은 과목을 강의하는 강사들은 7년전부터 강의 노트에 토씨 한번 바꾸지 않았다. 교과서 개정판이 나와도 교과서만 바뀔 뿐 강의 노트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학생이 뭘 아는지, 뭘 궁금해 하는지 알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학생들은 출석 체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앉지만 50분 강의 중 22분 48초 정도는 꿈속을 헤맨다. 질문은 궁금한 것이 있는 학생이 교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가 졸고 있는 학생에게 “어이~, 저기 맨 뒤에 앉아서 조는 녀석, 쟤 좀 깨워보게. 학생, 내가 방금 무슨 얘기했나?”라고 할 뿐이다.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강사 뒷마마를 까기에 바쁘고, 교수를 찾아가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지라 학교 생활이 힘들어도 교수를 한번 찾아가 상담을 하고 조언을 구하느니, 차라리 1년간 수능을 다시 공부해 의대나 치대를 가고 만다. 그렇지만 막상 학교를 옮겨봐도 사는 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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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지금 대학들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수많은 사람이 얽힌 여느 사회/정치/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문제고,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일 확률이 높다. 이런 문제의 해답은 어떤 특정 개인의 혜안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이 모두 좋은 성과를 낼 리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 중 대부분이 좋은 성과를 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실패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실패에 대해 강박적인 두려움을 안고 있고, 특히 지도자의 실패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냉정하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올해 나온 팀 하포드(Tim Harford)의 새 책 〈Adapt: Why Success Always Starts with Failure〉가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하포드는 새로운 시도에 있어서 3요소, 다양성(variation), 생존가능성(survivability), 그리고 선택(selec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양성이란 말 그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것. 생존가능성이란 그런 시도들을 함에 있어서 그런 시도들이 실패하더라도 조직 전체가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의 규모에서 시도할 것. 그리고 선택이란 이런 실패들로부터 계속 피드백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방법을 만들어/골라낼 것.

들어보면 무척이나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능은 사실 이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한큐에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과 완벽한 정보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한큐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다양성과 생존가능성, 그리고 선택에 의한 제도 보완에 회의적이다.

그렇다보니 흥미로운 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봤을 때 우리가 대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의 해법에 대해 우리 앞에 놓인 현실보다도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과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서총장의 동영상 강의에 대해 현재 대학 강의란 것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보다도, 대학 강의란 어때야 하는가와 비교하여 그 시도의 장단을 가려낸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였던가, 터치였던가에 “이상형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말 한번 참 잘했다. 그 어떤 제도적 보완도 우리의 이상과는 상대가 안 된다.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이를 이루려는 노력이 헛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마법은 없기에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건 좋다는 거다. 어떤 시도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듯이, 어떤 시도는 해보나마나라고 확신하는 것 역시 바보 같은 일이다. 물론 해보고 실패할 경우 “거봐, 해보나마나였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 정확히 배우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움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서 시도해 보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시험적으로 동영상 강의를 도입해보는 것에 찬성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게 당연히 결과가 좋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해도 상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 이 제도를 시행하려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강의에서 인간적 교류가 사라질 거라고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서 교수와 인간적인 유대를 느껴 봤던가? 또 어떤 사람들은 강의의 흐름이 일방적일 것을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의 중에 교수에게 질문을 던져봤던가? 다른 학생들은 다 아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면 바보 같아 보일까봐, 아니면 나때문에 진도 다 못 나가면 눈치 보이니까 따위의 이유로 궁금하게 있음에도 참았던 일들은 없었나? 또 강의시간에 필기하느라 정작 교수가 하던 이야기를 놓치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어떻게 보면 돌려 볼 수도 있고,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강의를 일시 정지시켜놓고 얼마든지 메모도 할 수 있는, 강의 페이스를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동영상 강의가 정말 나쁘기만 할까?

학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경험하는 일을 박탈당하는 것이 두렵다면 다음과 같은 보완책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소수의 몇몇 특출난 강사에게 강의를 전담시킬 수 있다면, 다른 교수들은 그만큼 강의 준비와 실제 강의를 하는 일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게 번 시간의 일부를 강의실이 아닌 곳에서 소규모의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에 할애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문제를 풀기를 원할 때 우리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다. 그 중에 어떤 아이디어는 딱 봐도 멍청하고, 어떤 아이디어는 딱 봐도 대박이다. 그렇지만 딱 봐도 멍청한 아이디어가 항상 실패하고, 딱 봐도 대박인 아이디어가 항상 성공하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아이디어가 똑같이 가치 있다거나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해봐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떤 제도에 대한 비판이 이런 시도가 지금 우리의 모습에 비해 얼마나 좋을까/나쁠까에 대한 논의 대신 이런 시도로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비교해서는” 한참 모자란 결과밖에 못 얻을 게 뻔해라는 것뿐이라면, 그런 공격은 그저 너무나 가볍고 쉬워서, 문자 그대로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로 논의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It adds nothing to the discussion.)

이런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게 기계적이고 강제적인 만남을 통해 어떻게 인간적 유대가 생기고, 사제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겠냐고. 아주 좋은 지적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 지적이 정확한만큼, 우리가 안고 있는 숙제의 종류 역시 명확해진다. 결국 이 모든 뿌리에는 어떤 제도, 이를 테면 단순히 대면 강의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는 일, 교수/총장과 학생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을 통해 사제간/학생들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이 시스템 안의 구성원들, 총장, 직원, 교수, 학생 모두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렸다. 오늘날 많은 대학 강의가 형편 없는 이유도, 동영상 강의가 학교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강의실 밖에서 학생-교수가 만나는 일이 기계적이고 무의미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결국 그 뿌리에는 딱 한가지 이유뿐이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총장-교수-직원-학생간에 관심도, 신뢰도 없기 때문이다.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연구할 시간을 뺏는 시간 낭비, 학생은 교수를 만나는 일을 늙은 꼰대의 잔소리 듣는 일, 총장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치기어린 아이들의 투정으로 취급하는 한 뭘 해도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학교육의 로망에 가까운 케이스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강의를 했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강의를 했기"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은 문제는 어떻게 강의를 할 것인가와는 전혀 별개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만들 것인가일 것이고, 이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충분히 해볼 필요가 있다.

자, 그러면 이 문제의 해법은 뭘까?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이 다소 균일하고 일방적이더라도 좋은 강사의 질좋은 강의를 듣는 것이, 교수 전반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여할 리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저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는 것, 그뿐이다.

@ 아, 그렇지만 서총장이 무조건 잘 했다는 건 아니다. 이번 일과 관련해 서총장이 엄청나게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들이 있다. 다만 그 비판의 촛점은 전적으로 다른 부분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왜 (이렇게 자주) 학교 내부자들이 언론으로부터 새로운 정책에 대한 소식을 접해야 하는가와 과연 제도가 실패했을 때 실패를 인정할 각오가 돼 있는가다. 그 외에 이 제도가 전적으로 쓸모없다는 논의는 앞서 말한 이유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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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16:27 2011/07/1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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