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면서 컴퓨터를 한대 사려고 한다. 도대체 어떤 기종을 얼마를 주면 적당할까? 요즘 구할 수 있는 랩탑 중에서 최고급 구성품을 200만원에 사면 될까? 300만원은 너무 비싼가? 100만원짜리 랩탑이면 되는데, 뭐하러 그런 비싼 걸 사냐고?

우리는 이런 판단들이 매우 현명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랩탑의 효용성을 측정하는 내부적이고 절대적인 잣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PC라고 할 수 있는 1975년의 Sphere I은 가장 싼 게 860달러였다. 당시의 화폐 가치를 고려하면 현시세로는 자그마치 3500달러, 약 400만원에 해당한다. 400만원짜리 이 컴퓨터와 요새 40만원이면 조립할 수 있는 컴퓨터 중 실제로 우리에게 효용이 더 높은 건 어느 것일까? 당연히 후자다. 그런데 후자가 더 효용이 높다면, 왜 우리는 400만원짜리 컴퓨터의 1/10 밖에 지불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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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공급 곡선이 움직이기 때문에,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떨어진 거다"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는 40만원짜리 컴퓨터가 실제로 나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가에 대한 답을 해주지는 못한다. 이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내면화돼 있지 않고, 주변의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Predictably Irrational>과 <The Upside of Irrationality> 등의 저술로도 유명한 Duke 대학의 행동경제학자 Dan Ariely가 실행한 실험을 살펴보자. Ariely와 그의 동료들은 MIT Sloan 경영대학의 MBA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급 초컬릿, 와인, 컴퓨터 주변기기 등을 경매에 붙였다.

학생들은 경매에 참가하기에 앞서 자신의 사회보장번호(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물건)의 끝 두자리를 경매용지에 적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는 특정 물품에 대해 이 숫자보다 더 많은 금액을 내겠느냐, 더 적은 금액을 내겠느냐는 질문에 답을 한 후, 자신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최고 금액이 얼마인지 적어내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각 물품에 대해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학생이 그 돈을 내고 그 물건을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당시 경매품 중 1998년산 꼬뜨 두 론 와인이 있었다. 우선 경매 용지에 내 주민등록번호의 끝 두자리를 적는다. 내 주민등록번호의 끝 두자리가 54라면, 나는 "이 와인을 54달러보다 더 비싸게 주고 사겠습니까, 더 싸게 주고 사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한 후, "이 와인을 얼마를 주고 사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경매 용지를 제출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건, 사회보장번호의 끝 두자리가 00부터 19인 사람들은 이 와인을 사는데 평균 8.64달러를 지불할 의향이 있었던 반면에, 사회보장번호가 80부터 99로 끝나는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27.91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거다. 초콜릿이나 컴퓨터 주변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이쯤에서, "사회보장번호가 성격이나 소비성향을 결정한단 말인가!"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_-,,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고, 이게 닻내림(anchoring)이라는 현상이다. 어떤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그와 유사한 다른 물건의 가격이 얼마인가에 의해 영향을 받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기 전에 자신이 접했던 정보 중에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것, 이를테면 자신의 사회보장번호 마지막 두자리 따위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숫자에 닻을 내린 후, 이 숫자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조정(adjustment) 과정을 거쳐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어떤 물건의 가치를 결정할 때에만 사용되는 게 아니다. Kahneman과 Tversky는 1974년,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 "아프리카 국가들 중 UN 소속 국가가 10% 이상입니까? 이하입니까?"와 "아프리카 국가들 중 UN 소속 국가가 65% 이상입니까? 이하입니까?" 그런 후에 두 그룹 모두에게 "아프리카 국가들 중 UN 소속 국가가 몇퍼센트나 될까요?"라는 질문을 하자, 첫번째 그룹의 평균은 25%였는데 반해, 두번째 그룹은 평균적으로 45%라고 답했다. 첫번째 그룹은 10이라는 숫자에서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정을 한 반면, 두번째 그룹은 65라는 숫자에서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가며 조정을 한 결과다.

물론 아프리카 국가들 중 UN 소속 국가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이런 닻내림과 조정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예쁜 신발의 가치와 같이 객관적인 정답 대신 주관적인 판단이 작용하는 부분에서는 이를 피해가기란 어렵고, 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조정당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까지 Kahneman과 Tversky가 처음으로 소개한 세가지 어림법과 이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편향된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를 살펴 봤는데, 사실 이런 게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이를 전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인간의 이성이란 게 얼마나 취약한지, 또 얼마나 쉽게 외부의 조건들에 의해 조정당할 수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과 지성에 대해 조금 더 겸손하고 조심스러워질 수는 있다.

도저히 틀릴 수 없을 것 같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판단과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걸 의심하는 건, 건전하고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의 출발점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2011/03/21 13:54 2011/03/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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