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사이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느라 뉴스를 등한시한 사이에 대형 폭탄이 터졌네. -_-,, 개인적으로는 capcold님과 생각을 같이 하는데, 그런 내용의 글은 잘 없는 관계로 글 하나 급하게 뱉어내봤다.
§불법주류상과 성직자(Bootlegger and Baptist)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이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누군가의 의도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추측해하야만 하는 이상한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클렘슨 대학(Clemson University)의 브루스 얜들(Bruce Yandle)이라는 경제학자가 각종 규제의 탄생 배경과 작동 원리(?)를 설명한 이론으로 불법주류상/주류밀매업자와 성직자 이론(Bootleggers and Baptists Theory)이란 것이 있는데, 이게 이런 우리가 늘상 하는 상대방의 의도 추측 게임에 꽤나 교묘하게 적용이 될 수 있다. 이 이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성직자들이 ’술은 사회적으로 유해하므로 최소한 주일에만이라도 금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한다. 이런 이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고 그 의도도 순수하다고 판단한 정부가 일요금주령을 발동한다. (금주령은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특정 개인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제삼자–정부의 힘을 빌린 교인들–가 대신 정해주는 것인만큼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선호한다는 원론적인 논의는 이 자리에서는 피하기로 하자.) 이런 식으로 규제가 발생할 때 뭐가 문제일까?
금주령이 발동될 경우 즉각적으로 일요일에 술에 대한 공급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의 강제적인 공급의 제거는 수요의 감소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술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고, 공급이 급감한 경우 그 수요와 공급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불법주류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이 불법주류상은 (음지에서) 시장을 독점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취하게 된다.
이 예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핵심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움직임이 정부 규제를 통해 특정 이익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이익 집단에게 이 규제를 유지 또는 강화할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불법주류상들이 금주령을 지지하는 원인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이지만, 그런 자신들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금주령 유지나 강화를 위한 로비를 할 때는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도덕적 당위성’ 따위를 내걸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집단, 성직자들과 불법주류상인들 사이에 의도치 않았던 연대가 형성된다.
얜들이 이런 현상의 실질적 예로 든 것 중 하나가 영국에서 18세기 미성년 노동법 규제 움직임이 처음 일었을 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섬유산업이 미성년 아동의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었다는 통념과 반대로, 섬유산업의 사용자들이었다는 거다. 그 이유는 이미 상당 부분에서 생산과정을 자동화한 공장 소유주들 입장에서는 미성년 아동들의 노동 규제를 통해 경쟁업체들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에게 ’어린 아이들의 인권 보호’라는 도덕적 구호만큼 효과적인 로비 수단은 드물었던 셈.
§ 정치와 도덕적 우위
이 이론과 일례는 도덕적으로 숭고한 가치라도 거의 언제나 누군가의 실질적이고 금전적인 손익과 맞물리기 때문에 그 도덕적 가치만을 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는 똑같은 행위, 예를 들어 음주의 사회적/개인적 폐해를 거론하며 금주령을 지지하는 행위 밑바닥에 도덕적 가치 보호(성직자, baptist)와 개인의 금전적 이득(불법주류상, bootlegger)[footnote]"불법"주류상이라고는 했지만 겉으로는 공익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사익을 도모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상징을 아우르는 말일 뿐 여기서 사적 이익을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느냐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footnote]이라는 두가지 철저하게 다른 이유 가 있을 수 있기에 누가 이 두 가지 중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파악하기란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자기기만을 하게 마련인지라 바깥 사람들이 봤을 땐 불법주류상에 가까워보이는 사람들조차 자기 스스로는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생산시설이 자동화된 공장주들 중 이게 자신의 손익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인권 보호”를 구호로 로비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싸움으로 바뀐다. 자신이 특정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가 성직자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설령 그로 인해 약간의 금전적 이익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건 부차적이거나 상황이 만들어낸 우연일 뿐 그런 실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설령 그 정책으로 인해 금전적 이득을 보더라도 그건 그 상황의 부산물일 뿐이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성직자여야 하고 실제로 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은 전부 불법주류상의 주장이 되고 만다. 이때 정치적 정당성 확보는 누가 성직자인가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압축이 된다. 그렇다보니 이번 곽노현 교육감-박명기 교수의 금품수수 사건과 유사한 일이 터지면, 한쪽에서는 곽노현이라는 개인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고, 또 한쪽에서는 이를 사수하려고 이를 악물고 싸운다.
이번 일을 놓고 곽노현 교육감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의 과거 행적과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그가 2억을 전달한 것에 대가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과 독립적으로 그의 과거의 행적을 판단하는 과정이 개입하여야 하는데, 그게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다. 우리는 그의 의도에 대해 그의 행동과 스스로 말로 밝히는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나만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결국 그 행동이 성직자적이었는지 불법주류상적이었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똑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 교육 정책은 곽노현보다 크다
그런데 그가 성직자인지 불법주류상인지를 조목조목 증거를 들어서 “과학적 진실”을 밝혀내듯이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행위에 있지 않고 의도에 있는데,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증거는 행위일 뿐이고, 의도는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들을 보고 그들이 성직자인지 불법주류상인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이미 누군가는 성직자이거나 불법주류상이라고 속단을 내린 상태에서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의 의도를 그에 맞춰 해석하는 일이 많다.
이는 검찰이 “표적수사”를 한다는 비판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표적수사라는 건 수사라는 검찰의 행위에서 표적이라는 의도를 파악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한명숙, 곽노현 등 한나라당 반대파와 관련해 이런 일이 유난히 많으 걸 보면 그런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금 전달을 “세련되게”할 줄 몰라 그냥 쉽게 들통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검찰의 의도를 “표적”수사라고 “지레짐작”을 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곽노현 교육감의 2억원 전달이 대가성이었다고 지레짐작"하지 않게" 만들기란 굉장히 어렵다. 사실 이건 그냥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곽노현이라는 개인의 도덕성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보호하려고 하다보면 자칫, 곽노현의 개인과 함께 진보적 정책이 다 같이 쓸려내려가는 수가 있다. 오히려 실제로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도 성직자들과 불법주류상들이 뒤섞여 있고, 상대방 정당에도 성직자와 불법ㅈ류상들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국민의 수에서 수십퍼센트의 지지를 받는 거대한 조직이 “나와 정치적 목적을 같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거나, “나와 정치적 목적을 달리 한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먼지 구덩이에 사는 사람들의 집단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무상급식을 살펴보자. 무상급식이 확대되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물론 있다. 무상급식이라고 해서 급식 업체들이 무상으로 밥을 제공하는 게 아닌 이상, 급식 업체들로서는 급식 대상이 많아지는 무상급식 정책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면 급식 업체들이 무상급식 찬성을 위한 로비를 할까 안 할까? 거대하고 조직적인 로비는 있지 않더라도 어느 구석에선가 누군가는 “아이들 밥 먹이는 일이니 잘 풀리게 힘 좀 써달라”며 무언가를 주고 받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글쎄.
무상급식을 지지한 모든 사람들이 “모든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공평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순수한 목적만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무상급식을 제도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중요한 거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익집단이나 계층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니고, 그들이 얼만큼의 발언권을 가졌느냐도 아니고, 그 정책이 사회 전체의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는가 아닌가이다.
미성년 노동을 주도적으로 반대한 세력이 이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해서 미성년 노동을 금지한 게 그 자체로 사회적 해악은 아니었던 것처럼, 곽노현 개인이 사적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펼치려했던 교육 정책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곽노현이란 인물이 성직자이냐 불법주류상이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불법주류상과 성직자는 공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은 항상 baptist라는 착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우리가 불법주류상이고 때로는 우리가 성직자다.(Bootleggers and baptists live everywhere, even inside us.) 그렇다면, 백년지대계라는 교육과 관련한 정책이 아무렴 곽노현 개인보다는 커야하지 않겠는가?
@ 이쯤에서 개인적으로는 곽노현 교육감은 사임을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행위의 의도가 무엇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려운만큼이나 나의 의도를 남에게 증명하기도 똑같이 어렵다. 박명기 교수에게 돈을 공개적으로 건내주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았던 것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그 행위가 어떤 의도를 갖고 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란 걸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이고, 그 행위 자체를 인정한 이상 도덕성에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 이거 갑자기 과학 블로그를 빙자한 정치 블로그가 돼 버렸는데, 이번 주중으로 “나의 과학은 이렇지 않아 16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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